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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ey Nov 12. 2023

강미선, '갓'미선이 되기까지

발라레 인생 3막: 무용수 이야기 2회 A편 By Sujiney

어떤 인터뷰는 후회를 부른다. 내겐 강미선 유니버설발레단(UBC) 수석무용수 인터뷰가 그랬다. 후회의 이유는 단 하나, 인터뷰의 타이밍. 인터뷰 내용은 더할나위 없었다. 강 수석이 들려준 이야기는 단어 하나, 행간의 침묵마저 보석 같았으므로. 그를 만난 건 2022년 12월, '호두까기 인형' 서울 공연을 앞두고서였다. 딱 6개월만 더 기다렸다면, 강 수석의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수상 소식도 쓸 수 있었다. 그걸 못 기다렸다는 게 유일한 후회다.


브누아 드 라 당스 오피셜 인스타그램 계정에'소개된 강미선 무용수와 이동탁 무용수. Benois de la Danse Instagram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그래도 그때, 인터뷰하길 잘했다고. 사실, 강 수석 인터뷰는 내게 장기 프로젝트였다. 같은 해 2월 문훈숙 UBC 단장을 인터뷰하며 들었던 다음 한 문장이 계기가 됐다.
"미선이라면, 해낼 겁니다."


강미선 무용수가 출산 뒤 약 8개월만에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이하 '잠미녀') 주인공 오로라 역으로 무대에 선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다. 문 단장의 눈엔 확신의 빛이 서려있었다. 함께 자리한 발레단 관계자들도 고개를 끄덕끄덕. 그 '잠미녀'뿐 아니라 최근엔 '돈키호테' 무대에 함께 오른 김현우 발레조아 원장님(전 UBC 무용수)은 최근 "미선이야 워낙 잘했지만 출산 후에 더 잘한다, 깊이가 더해졌다"고 극찬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무용수라니, 어찌 아니 궁금하리오.

기다리고 기다렸던 '잠미녀' 무대. 문 단장의 말은 맞았다. '오로라' 강미선은 빛이 났다.  


당시 썼던 기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유해주셨다♡



'잠미녀' 오로라는 체력 소모가 많고 테크닉 적으로도 고난이도의 무대다. 밸런스의 끝판왕 '로즈 아다지오'부터, 14살 외동딸 공주의 발랄함을 표현하는 발재간의 끝판왕 등장 신, 결혼식의 그랑 파드되(pas de deux, 2인무)까지, 추다 보면 19세기를 풍미한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원망스러워질 법한 대작.
그런데, 강미선 수석의 오로라는 쉬워 보였다. 보는 관객의 마음이 편안했다는 의미다. 쉽지 않은 무대를 쉽게 느끼도록 했다는 건, 단순 테크닉을 넘어선 일종의 경지다. 강미선 수석는 특유의 관록과 의지로 자신만의 오로라를 췄다. 이듬해 그가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손에 쥔 것은, 어찌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브누아 드 라 당스는 흔히 '발레의 아카데미 상'으로 통한다. 선정위원회 홈페이지는 "세계 발레계를 대표하는 심사위원들이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안무가와 무용수를 선정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강미선 수석은 그 상을 손에 쥐었다. 강 수석의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 이후 갈라 공연(UBC의 '코리안 이모션', 또다른 멋진 수석, 이동탁 무용수와 함께 했다)의 사진은 우리 신문 1면에도 등장했다.    




대한민국처럼 1면 기사꺼리가 차고 넘치는 나라도 드물지만, 강 수석의 수상 소식은 전쟁도 정쟁도 인플레이션 소식도 물리치고 당당히 1면을 차지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지난해 가장 아름다운 1면이었다. 그런 강미선 무용수가 내게 "저는 부족한 것 같았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 소 회의실에서. 2022년 12월 6일, '호두까기 인형' 리허설 직후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와의 인터뷰 녹취록을 다시 꺼내 읽으며, 마음이 경건해졌다. 리허설을 끝낸 직후, 몸과 맘은 녹초가 된다. 프롤로그에도 썼지만, 발레란 인간적이지 않은 잔인한 예술이다. 인간의 몸이 편하게 있으려는 방향의 정반대를 요구한다. 턴아웃과 풀업이 대표적. 그래서 몸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그걸 드러내선 안 된다. 세상에서 이렇게 쉽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없다는 듯 사뿐히 날아오르고 날렵하게 돌아야 한다. 강미선 수석이 존경한다고 얘기한 율리아나 로파트키나(Ulyana Lopatkina)마린스키 무용단 수석무용수가 이렇게 말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무용수라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아픈 게 당연합니다. 아프지 않다면? 한 가지 경우밖에 없죠. 죽었을 때."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내고, 모든 곳이 아픈 그에게 1시간 가까이 질문을 쏟아내야 했다. 리허설 현장을 지켜보며 감탄과 경탄을 했지만 미안했던 이유. 리허설 후 10분이나 쉬었을까, 강 수석은 바로 옆 인터뷰 장소인 회의실에 나타났다.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낸 사람 특유의 고요함을 지닌 채. 인터뷰가 끝난 뒤, 동행한 사진기자가 제안했다. "무용수분만 괜찮으시면 촬영은 다시 하러 올까요? 지금은 연습 직후라 너무 힘드실 것 같아서." 강 수석도 원하는 바였다. 그렇게 촬영한 사진들이 아래의 스크린샷.




사실, 조금 놀랐다. 바쁜 척 하기 대마왕들인 기자들 중에서도 사진기자는 거의 분 단위 스케줄을 소화한다. 그런 그(장진영 기자)가 시간을 다시 내겠다니. 물어봤다. 성실의 아이콘인 진영 씨는 쿨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분을 찍을 땐, 나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요지로.  

브누아 드 라 당스 관련 소감을 직접 물어보고 싶어서, 욕심을 냈다. 강미선 수석에게 이번 브런치 스토리 글을 쓰기 위해 직접 연락을 취했다. '호두까기 인형' 등 공연을 앞둔 시점이라 한창 바쁜 때인지라, 답변이 오지 않아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러나 강미선 수석은 "육아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답변이 늦었네요"라며 너무도 친절한 답변을 보내왔다. 아래처럼.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 후 달라진 점은, 발레를 하는 것과 무대에 서는 제 자신 모두에게 스스로 더욱 엄격해졌어요. 아무래도 그 상이 가진 무게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관객분들, 또는 발레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수상자의 공연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무대를 보신다면, 기대가 더 클 테니,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고, 약간의 부담의 무게(?)도 있답니다(웃음). 수상 후엔 너무 많이들 축하를 해주셔서 아직도 감사하고 기쁘게 지내고 있답니다. 오랜 기간 못 뵈었던 분들께도 축하 인사를 받고, 아직도 쑥스럽지만 수상한 걸 실감하며 행복하게 지낸답니다. 발레단과 집에서의 일상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어요. 발레리나 맘으로 바쁘게, 열심히 살고 있어요(웃음)."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하며 세계적 발레리나로 역사의 획을 그었으니 그만큼 부담들 덜 법도 하건만, 강미선 수석은 "그래서 더 책임감을 느낀다"거나 "일상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역시, 강미선이다.

그렇게 아래 링크의 인터뷰 기사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나는 또 혼났다. 너무 길게 썼기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25571
그나마 핵심의 핵심만 추린 게 위의 기사 내용. 발레의 ㅂ에 관심도 흥미도 없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도 소구력을 갖춰야 하기에 아쉬웠다. 그래서, 녹취록을 기반으로 다시 쓴 글은 아래에 살짝, 전체는 다음주에 공개한다. 원래 이번주에 다 소화하려 했지만, 워낙 좋은 내용들이 많아 2번에 나눠서 소개하기로 한다. 자 그럼, 시작한다. 일문일답.




2022년으로 유니버설발레단 근속 20주년이 되셨네요.

"출산 후 복귀도 했고, 입단 후 ('잠미녀') 오로라로 데뷔도 했고, '올해를 빛낸 무용수' 상도 감사하게 받게 됐네요. 좋아하는 작품인 '오네긴'도 할 수 있어서 춤을 추면서 굉장히 감사한 마음이었어요. 한 곳(UBC)에 오래 있다보니 올해 한국 나이로 마흔이네요. 인생의 반을 발레단에서 보낸 셈이에요.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났네, 싶기도 하고요. 중간에 여러 고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저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나온 것 같아요."  


어떤 고비가 있었을까요.

"큰 슬럼프는 다행히 없었지만 중간에 공연하다 부상을 몇 번 입긴 했어요. 다행히 회복이 잘 됐죠. 움직일 수 있었던 정도의 부상이었다는 게 감사하고요. 힘든 건...글쎄요, 어렸을 때 스물이나 서른 초반 정도에 다양한 춤을 추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원하는 캐스팅이 안 나오면 마음이 조금 힘들었을 때가 있었어요. 그래도, 받은 역할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며 극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로라가 데뷔라는 것도 좀 의외인데요.

"제가 수석으로 승급한 게 2012년인데, 그해 '잠미녀'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오로라 캐스팅이 안 나왔어요. 파랑새(의 플로리나 공주)로 캐스팅이 됐죠. 조금 '어?' 놀랐어요. 수석 승급했으니 당연히 주역을 받겠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곳도 많아요. 마린스키 등도 그렇고, 꼭 수석이라고 주역을 받지는 않아요. 그 작품에 맞는 이미지의 무용수가 있기도 하고, 여러 경우의 수가 있으니까요. 저보다 더 잘하고, 이미지가 더 맞는다면, 저라도 단장님이나 감독님이라면 그렇게 기회를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속상했을 것 같아요.

"네, 해보고 싶은 욕심은 있으니 속이 상했죠. 아 나는 '잠미녀'와는 인연이 없구나 싶었어요. 오로라는 못해 볼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죠. 마린스키 발레단의 율리아나 로파트키나 무용수 너무 좋아하는데요, 그분도 모든 역할을 다 해본 건 아니니까요. 반대로 제가 예전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오네긴'의 (주역) 타티아나 역을 받았던 적도 있거든요. 그때는 너무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었어요. 생각이라는 게요, 참...한 '끗' 차이인 거 같아요."


어떤 의미일까요?

"캐스팅에 계속 연연했다면 힘들었을 텐데, 생각을 바꿨어요. 이렇게요. 그래, 그럼 나는 완벽한 파랑새 공연을 보여드리자. 관객 분들의 기억에 남는 파랑새를 추자고요. 당시 파트너를 붙잡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관객의 뇌리에 파랑새가 너무 좋았다는 생각을 심어드리자, 그러니 우리 열심히 연습하자'고요. 생각해보면 매번 그랬던 것 같아요. '지젤'에서도 (주인공 지젤의 친구가 추는) 페전트 배리에이션이나 '돈키호테'에서도 (주역) 키트리의 친구 역할 받으면서 그랬거든요. 그 역할을 최고로 추어서 관객이 잊을 수 없게 표현하고 표출하자고요."


브누아 드 라 당스 무대의 강미선, 이동탁 무용수♡ Universal Ballet official Instagram


와우. '갓'미선이라고 불리실만 하네요. 멘탈까지 강철이십니다. 연습 워낙 열심히 하시죠?

"연습벌레이긴 해요(웃음). 20대 후반 즘엔 남편인 콘티(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함께 밤 10시까지 연습했어요. 일찍 와서 몸 풀고 클래스 하고, 6시면 일과가 끝나는데 그때 남편과 살짝 요기 정도 하고 7시에 다시 (연습실) A홀 돌아와서 클래스 다시 하고, 음악 틀고 이것 저것 맞춰보는 거죠. 거의 9시30분, 10시까지 했어요. 마지막에 불 끄고 나오는 무용수였죠. 휴가 때도 안 쉬고 나와서 선배들이 '휴가 때는 놀아야지' 했어요(웃음)."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그냥...여기(연습실에) 있는 게 좋았어요. 놀면서 연습하고 그런 거죠."


아무리 '갓'미선이라고 해도 연습이 항상 잘 되진 않을 텐데요. 잘 안 되면 어떻게 하나요?

"몇 번 해보다가 안 되면 그냥 안 해요. 학생들에게도 티칭할 때 얘기하거든요. 안 되는 걸 계속하면? 안 되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과 같지 않냐고요. 예를 들어 (몸이 앞으로) 쏟아지는 걸 연습하는데 계속 쏟아진다면? 그건 쏟아지는 걸 몸에 기억시키는 것과 같아요. 딱 놓을 때는 놓아야 해요. 그대신 다음날 다시 정리하는 거죠. 정리를 하고 다음날 돌아와서 기분 좋게 클리어한 마인드로 해야해요. 안 되는 걸 계속 하면 계속 안 되더라고요. 버릴 건 과감하게 버리고, 다음날 다시 깨끗하게 하는 거죠. 연습이 잘 안 된 날은 집에 와서, 아니면 저만의 시간이 있을 때 머리 속으로 연습, 즉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요. 이걸 하고 다음날 연습을 하는 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몸만 다시 와서 연습하는 건 또 다르더라고요. 자기 전에 누웠을 때도 생각하고, 차 타고 갈 때도 음악 들으면서도 정리하는 거죠. 연습 방식은 무용수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한 가지로 오래 하진 않아요. 될 때까지 주구장창 하지 않고 짧은 시간에 하는 거죠."


이 지점에서 강미선 수석은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항상 '연습은 공연처럼, 공연은 연습처럼'이라고 하셨다"라면서다. 과연, 그 무용수에 그 어머니이다. 그는 "연습할 때도 감정이나 폴드브라(port de bras, 팔의 움직임) 다 완벽하게 하고, 대신 무대에서는 편안하게 연습처럼 하라는 말씀을 항상 들었기에 몸에 배어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머지는 다음 회차에. 강미선 수석이 취미발레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보너스로 전할 예정이니, 다음주도 꼭 읽어주시길!)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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