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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도 끝은 있다. 발레 부상이라는 절망의 끝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38회, 부상이여 썩 물렀거라

by Sujiney

"끝이구나."
영국 로열발레단 스티븐 맥레이 수석 무용수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우지끈 뚝딱, 그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농' 공연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다. 2019년 10월. 그는 발레 무용수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 공연 중, 2250여명의 관객이 보는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것.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무용수라고 해도, 그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그리고 약 5년 3개월이 흐른 지난 14일(영국 현지시간). 그는 BBC 다큐멘터리와, 영국 종합일간지 가디언에 게재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상을 당하던 순간. '우지끈'하며 아킬레스건이 부러지는 걸 느끼며, 무용수로서의 내 경력은 끝났다고 절망했다."


출처 및 저작권 Steven McRae instagram


하지만 절망이 절망으로만 끝났다면, BBC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을리 없고, 가디언이 소중한 칼럼 지면을 내줬을리 만무하다. 그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냈다.


고통의 시간을 거쳐.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낸 그의 레시피는, 우리가 모두 다 아는 것들이다.

꾸준함,

할 수 있다는 믿음,

포기라는 단어를 잊는 것.



Copyright Steven McRae Instagram




요즘 많이들 이야기하는 회복 탄력성(resilience)를 구성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 모두 아는 것들이다. 알지만 못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 어렵고 힘들고 아프니까. 게다가 절망의 구렁텅이가 깊을수록 그 어려움과 힘듦과 아픔은 배가 된다.

하지만, 스티븐 맥레이는 그 과정을 이겨냈다. 그리고 지난 14일,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으로 다시금 무대에 섰다. 그의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A Resilient Man)'. BBC는 제목을 살짝 바꿔서 '다시 빛의 무대로 춤추며 나아가다(Dancing Back to the Light)'라고 붙였다. 둘다 멋지다.



Copyright BBC, Steven McRae Instagram


이건 추측이지만, 아마도 그의 이 무대에 맞춰 BBC가 그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듯. 그가 인스타그램에 적은 글을 그대로 가져온다. 살짝 윤문했다.

"제작자와 감독, 작가들이 함께 모여 완성한 이 다큐멘터리가 BBC에 방영된다는 자랑스러운 소식을 전합니다. 이 영화는 저만의 성취가 아니라, 수많은 창작자들이 모여 만든 것으로,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꼭 봐주세요."


Copyright BBC, Steven McRae Instagram


그는 각 언론 매체들과의 인터뷰 지면을 찍어 올렸는데, 그의 자녀들이 그 지면을 바라보는 사진은 특히나 인상적.

생각한다. 이렇게 인스타 피드를 올리기까지, 그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그가 부상 후 섰던 첫 무대는 2021년이었다. 하지만 주역 역할은 아니었다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매드 해터(the Mad Hatter) 등이 대표적. 그를 잘 몰랐을 때, 로열발레단의 매드 해터를 보고 이 무용수 누굴까 전율했던 기억이 난다.

맘 같아선 당장 런던으로 날아가 그의 무대를 보고 싶지만, 언젠가, 한국에도 와주길 바라며.

우리 한국의 발레 무용수분들도 부상을 이겨내는 과정을 종종 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이렇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낸 우리 무용수들의 이야기를 멋지게 남기고 싶다고.


국립발레단 안수연 무용수님 인스타그램 스토리. 부상 후 연습 사진이라고 한다.



부상과 절망과 고통에도 끝은 있다.
"이젠 끝이야"라고 생각했던 맥레이의 고통에도, 끝이 있었듯.

발레뿐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고통에도,
끝은 온다.
응원을 보낸다, 조심스럽게.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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