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유리 같은 것

스무 번째 브런치 By SJ

by Sujiney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버려진 유리공장이었다고 한다. 연남동의 복작거림을 피해, 모퉁이에 숨어있는 옛날식 빨간 벽돌 건물. ‘도시 재생’을 테마로 하는 프로젝트 그룹이 카페 겸 갤러리로 탈바꿈시켰다. 페인트칠은 군데군데 벗겨지고, 벽돌은 깨져있다. 소박한 장소임에도 꽤나 존재감 있는 샹들리에가 걸려 있길래 의미가 궁금했는데, 유리공장이었던 시절에 대한 오마주 아닐까 싶다.


낡은 벽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샹들리에. By SJ


버려진 이들과 것들이 궁금하다. 살면서 버리는 쪽 보다는 버려지는 쪽이 많았기 때문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버려진 것이 어떻게 되살아나는지가 궁금하다.


어젠 버려진 유리로 멋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만드는 분들의 원데이 클래스에 다녀왔다. 양옥집 나무 창틀에 으레 끼워져 있던 꽃무늬 반투명 유리 등을 활용해 스탠드를 만들었다.


깨지기 쉬운 유리를 내가 원하는 대로 깨는 것, 쉽지 않았다. By SJ


유리를 자르고, 납으로 땜질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깨지기 쉬운 유리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깨지게 하고, 그렇게 깨뜨린 유리를 다시 이어 붙이는 과정을 마치고 장갑을 벗으니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사랑만 유리 같은 게 아니구나. 인생도 유리 같다.


버려진 유리가 그렇게 스탠드로 변신해 내 방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버려지고 깨졌다고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낸다면 파국은 새 출발일 수 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처럼.


이별 직후. [영화사 공식 스틸컷]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 주인공 이름을 쓰는 조제. 삶의 의미를 못 찾고 방황하던 철없는 대학생 츠네오는 조제에게 빠져들지만, 결국 도망치고 만다. 츠네오는 아래 대사를 읊고, 길을 걸어가다 (두 다리 튼튼한) 새 여자 친구가 보는 앞에서 백주대낮에 대성통곡을 한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실은 하나다. 내가 도망쳤다(僕が逃げた).”


못난 놈, 이라고 욕해준 때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츠네오 마음도 이해가 된다. [영화사 공식 스틸컷]


조제는 하지 않는다. 대성통곡 따위. 츠네오가 끄는 유모차 없이 밖에 나가지도 못하던 조제는 없다. 이제,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 장을 본다. 집으로 돌아와 츠네오가 좋아하던 계란말이를 만들고, 겨 된장 장아찌 누카즈케(糠味漬け)를 담가 혼자 먹는다. 전 남친이 좋아했기에 못 먹겠다고? 감정 사치다. 생존이 힘이 더 세다.


누카즈케. 가지도 저렇게 절이면 맛있겠다. 저 잠바, 마지막 장면에도 등장하는 그 잠바다. [영화사 공식 스틸컷]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진 않았다. 일단 생명이 주어진 이상, 24시간 365일을 소중히 살아내야 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조제가 낡았지만 깨끗이 빤 회색 잠바 차림으로, 아마도 장을 보러 가는, 뒷모습.


아 배고파. [영화사 공식 스틸컷]

여기에서, 노래 한 번 듣고 가시겠다. 리메이크곡도 좋지만, 역시 오리지널이 최고. '사랑은 유리 같은 것' by 원준희.


https://www.youtube.com/watch?v=U7rnVXHdYGw



(너무 자주 인용하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도 파국 or 파멸이 중요한 화두다. 다음 대사를 보자.


“Ruin is a gift. Ruin is a road to transformation.” (“파멸은 선물과 같아. 파멸이야말로 변화에 이르는 길이거든.”)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리즈 길버트가 이탈리아에서의 맛있는 한 계절을 보낸 뒤, 바다 건너 뉴욕의 동거인에게 보낸 이별 통보 e메일 중 일부였다.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영화 캡쳐.


“소중한 상처 같은 거지. 너무 달콤한 이별 같아서 놓아주기 싫은 거야.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 무너져서 파멸하는 것, 그래서 생기는 변화가 두렵기 때문에 현재의 불행에 안주하는 거야.” (It feels like a precious wound, a heartbreak you won't let go of because it hurts too good. We all want things to stay the same. Settle for living in misery because we're afraid of change, of things crumbling to ruins.)


이 쿨한 언니는 이렇게 이별의 매듭을 짓는다. “행복하기 위해 불행하자는 거, 나는 못하겠어. 우리는 그 이상을 바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리곤 사랑 따위 믿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다, 발리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연애는 무섭다. 너무 달콤해서 피할 수가 없는데, 나의 일상을 압도하고 파괴한다. 그리곤 나중엔 그 연애 자체가 끝을 맞고야 만다.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고? 축하드린다. 그런 사랑은 없지만, 그렇게 착각할 수 있는 유대감이란 흔치 않다. 전생에 나라를, 아니, 은하계를 구하신 것 같다.


철없던 시절, ‘사랑을 사랑해(I love love)’라는 말의 열렬한 신봉자였지만 이젠 김연수 or 권여선 작가의 글로 기억되는 아래 글이 더 좋다. 내가 원할 때면 언제나 모니터에 나타나는 미켈레 모로네만 있으면 되지. (TMI이지만, 미켈레 모로네도 이혼을 하고 인생의 암흑기를 보내다 지금의 스타덤에 올랐다.) 혹시 아나. 일론 머스크가 지루한 나머지 미켈레 모로네 디바이스를 개발해줄지. 돈 열심히 벌어야겠다.



2020년 따끈한 신작 영화 ‘이젠 그만 끝낼까 해(I’m Thinking of Ending Things)’에서도 비슷한 대사들이 반복된다. “모든 관계엔 유통기한(expiration date)이 있다”는 것.



좀비 하나 안 나오는 이 스릴러 영화를 무려 사흘째 보다 말다 하는 중인데, 너무 무서워서 진도가 안 나간다. 나와 남의 관계라는 게 이렇게 덧없다는 걸 너무 덤덤하게 툭 내밀어버리는 불친절함이 날카롭다.


죄송하다. 외국어 스킬에 도움이 되는 글을 이번 주는 쓰지 못했다. 다음엔 그만 징징거리고, 파국을 딛고 변신을 시도하는 씩씩함으로 돌아오겠다.


다가오는 한 주, 안녕하시길.


By SJ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쩌다 이탈리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