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긴 했지만 교보에서 다치요미(立読み), 즉 사지 않고 서서 읽었으니 그다지 억울할 건 없다. 의지박약 홍보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 지난주 예고했던 이번 주 브런치 주제, 발레 여성 캐릭터 분석을 하기엔 너무 게으르다는 점을 설명 or 해명하기 위해서다.
새벽 4시 30분에 잠이 든 건 이 책 때문이다. 『명랑한 은둔자』 by 캐럴라인 냅.
축복 같은 책이 있다. 가슴이 미어져서 진도가 안 나가는, or 진도를 빼기 싫은 그런 책. 내겐 이 책이 그렇다. 읽다 보면 와인 한 잔 안 할 수가 없고, 안 울 수가 없고, 그래서 책이 보라색과 아이보리색으로 얼룩덜룩해지는 책. 남이 볼까 침대 옆 책장에 꼭꼭 숨겨놓고 피곤하지만 잠은 안 도는 새벽에 다시 꺼내보는 책. 손에 너무 익어 한 번에 딱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펼쳐지는 그런 책.
위는 책 표지. 아래는 저자인 캐럴라인 냅. Caroline Knapp.
책 소개를 찍었다. 뒤에 보이는 책은 '투스카니의 태양'. By SJ
짧게 소개하자면, 미국인 여자로 중상류층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다니고 기자로 밥벌이를 했으나 항상 세상에 화가 나 있었고 알코올부터 담배 등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한 건 다 골라 탐닉하다 못해 중독됨.
그 중독의 치유 과정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다룬 책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된 『Drinking』.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못 끊은 탓이 컸는지, 42세였던 2002년 폐렴으로 사망. 아래 랭크는 뉴욕타임스의 부고 기사다. 기자도 냅의 찐 팬이었던 듯 행간에 故人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냅의 『명랑한 은둔자』는 편역이다. 옮긴이의 말이 책 제일 처음에 나온다. 개인적으로 (편협하고 못된 점이지만) 세상 쓸데없는 게 옮긴이의 말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도 번역을 많이 했고 하고 있지만, 번역이라는 건 bridge 그 이상이 되면 안 된다. A라는 지점에 있는 독자를 B라는 지점에 있는 작가에게 이왕이면 가장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데려다주는 것. 다리가 지나친 존재감을 가지면 다리가 아니게 된다. 다리의 미덕은 겸손과 스스로를 감추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예외.
옮긴이 김명남은 자신이 왜 이 책을 이런 방식으로 옮겼는지를 담담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서술한다. 자신도 알코올 중독에 걸렸었다는 것. “『드링킹』을 읽고 술을 끊은 뒤에 여성이 쓴 술 이야기를 술 없이 읽는 취미를 들였는데”라거나 “마시다 술이 떨어지면 애타니까 (중략) 하룻밤에 세 번 편의점에 갔는데 취중에도 세 번 다 다른 곳을 찾아갔다”는 등의 내용.
격하게 공감했다. 책을 읽기도 전에 옮긴이의 글에 탄복한 건 짧지 않은 독서 인생에서 처음.
좋아는 했지만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존경은 하지 않았던 선배 A. 지금은 기자라는 업을 버리고 정치로 간 그분은 하루에 폭탄주를 밥 대신 ‘먹었’다. 안주는 살도 찌고, 건강에도 안 좋으니 패스. 대신 폭탄주를 자신의 레시피로 제조해 하루 10잔 플러스알파를 마셨다. 그땐 걱정도 됐지만 이해도 됐기에 같이 마셨다. 대신 전문용어로 '제조'하는 역을 자처하면서 '알잔' 비율을 줄이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약 5년 지난 지금은 내가 그렇게 마신다. 주종은 다르다. 폭탄주는 배불러서 못 먹겠고, 대신 와인. 드라이하되, 산도와 바디감이 다른 각지 와인을 찬장에 가득 채워놨다. 아마도 어정쩡한 상태로 혼자 살게 됐을 때부터였던 거 같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건 다행이면서도 불행이다. 가장 손쉬운 위로가 와인이다. 맥주는 배부르고. 사케와 막걸리는 다음날 머리가 아프고. 폭탄주는 마는 과정이 귀찮다. 소주는 맛없고.
무겁고 재미없는 내용 읽으시느라 고생이신 독자께 바치는 귀여운 냥이 이미지. 구글링하다 만난 보물. 저작권이 불분명ㅠ
아직까진 심각한 중독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간 중독이 될 거 같아 두렵다. 그럼에도,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들으면서 어찌 아니 와인을 마실 수 있을까. 이런 식의 해괴망측 변명을 잔뜩 늘어놓곤 한다. ‘바람이 분다’는 진정 명곡. “사랑은 비극이어라/그대는 내가 아니다/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가사라니.
이소라가 수년 전 모 프로그램에 나와서 “저는 사랑이 지겨워서요 이제 안 할 거예요”라는 요지의 말을 하는 걸 보면서 안 됐다고 동정했었다. 지금은, 공감한다.
사랑은 남루하다. 길어봤자 2년 가는 불량식품. 지긋지긋하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남자란 그 희소성만큼이나 격하게 아껴줘야 하는 존재이기에, 이렇게 모니터에 띄워두고 감상한다. 혼자가 좋다, 혼자가 편해.
By SJ
냅이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가 ‘혼자’다. 정확히 말하면, 고독과 고립의 차이에 냅은 천착한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있는 것이다.”
“'난 할 수 있어. 이렇게 내내 혼자 지내면서도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어.' 그리고 내 손을 내려다본 순간, 내가 어디선가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간의 궤도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면 꼭 이렇다.”
“고독의 즐거움과 고립의 절망감.”
냅 같은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 가장 친한 친구는 이미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엄마가 돼서 나와는 다른 궤도를 걸어간다. 한국에 남은 나는 솔직히 외롭다. 고독은 편리한데 고립은 무섭다.
사람들은 내가 일하는 모습이나 내가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이는 모습을 보고 나를 외향적이라고 판단하지만 사실 나는 꽤나 내향적인 인간이다. 가끔 산책 나갈 수 있는 뒷산만 있다면 5일까지는 입 벙끗 않고 살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추석에 그렇게 지내기도 했고. 문제는 때론 공감이 그립다는 것.
이해받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
뜬금없지만...
교토에 사는 친구가 아이를 낳은 뒤 한 말.
“산다는 게 끝간 데 없이 지루하고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잖아.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근데 아이를 낳고 나니 그래도 사는 의미 하나는 생겼다고 느껴져.”
진심,부러웠다.
산다는 건 결국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일에 불과하다.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아야지. 하지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뾰족한 신경을 부드럽게 덮어주는 존재는 책과 술.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의 끝을 보고, 인사도 없이 끝나는 예의 없는 이별을 겪고 나니 더욱 그렇다. 책과 술은 적어도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보다 낫다.
이런 남자도 있다. 아직 살만하지♡ [미켈레 모로네 인스타그램]
냅 이외에도 고독, 즉 외로움에 대한 좋은 글을 쓴 작가들은 많다. 특히 여성 작가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도 그중 하나.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잘난 척 하지만 SNS 친구의 담벼락에서 보고 한눈에 반했다.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제목의 책.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겁이 많은 나는 조용히 캐럴라인 냅의 『Drinking』을 교보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 살고 싶으니까.
행복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매일의 작은 기쁨에 감사하며, 대신 돈은 (꼭!) 잘 벌고, 평안하게 살고 싶다. 언젠가 투스카니에 살 날을 꿈꾸며.
'투스카니의 태양 아래'의 한 장면.
이탈리아어 공부도 나름 순조롭다. 안 될 땐 이런 구도로 공부.
여기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것으로 현실을 견디는 이들은 나 말고도 많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T언니가 추천해준 ‘투스카니의 태양 아래’도 그렇다.
다이안 레인 주연의 영화로도 탄생한 이 소설은 based on a true story다. 이혼당한 뒤 정처 없이 떠난 이탈리아 여행 중 우연히 버려진 집을 매입하고 되살리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프랜시스의 이야기.
'투스카니의 태양 아래' 스틸컷. 몇년 후 내 모습이다. [영화 공식 스틸컷]
넷플릭스에도 '여기 아닌 어딘가의' 테마의 변주는 넘쳐난다. 명작 오브 더 명작인 ‘Eat Pray Love’부터 근작 중엔 ‘Falling Inn Love’까지. 미국 여성이 사랑도 일도 잃고 우연히 뉴질랜드의 버려진 inn을 인수해 수리하는 과정에서 인생도 수리한다는 줄거리다. 제목(Falling Inn Love)은 falling in love의 말장난.
명작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대사는 기억에 또렷이 기록.
“Leap and the net will appear.”
수필가인 존 버로우스의 명언을 재인용했다. 뜻을 의역하자면 “일단 저질러! 그럼 될 거야” 정도. 원문 그대로는 “일단 뛰어. 그럼 (너를 지탱해줄) 그물이 나타날 거야.” 정도가 되겠다.
일단 저지르기 전엔 투스카니 부동산 클릭 서치부터 열심히 하고. 와인에 중독 아닌 탐닉을 하며, 여전히 아침형 인간에 대한 목표를 버리지 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