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엔 역사적으로 여러 일이 있었다. 구글에 “What happened on November 22?”를 검색하면 여러 사건들이 나온다. 아예 www.onthisday.com 이란 웹사이트도 있다.
1. 1497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이름부터 본투비 탐험가)가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향했다. 유럽의 숙원이었던 인도 항로를 개척한 의미가 있음.
2. 1963년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3. 2005년 동독 출신 과학자인 앙겔라 메르켈이 독일의 첫 여성 총리가 됐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2일 올린 메르켈 총리 취임 15주년 축하 포스팅 [페이스북 캡쳐]
그리고, 물론 역사책엔 기록될 일 없겠지만, 20세기 후반의 어느 11월 22일엔 내가 태어났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글을 쓰는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점을 쓰기 위해서 희망봉이며 케네디, (걸 크러시) 메르켈 총리까지 끌어들인 셈. 뭔가 면목 없지만 죄지은 건 아니니까, 엣헴.
자고로(는 아니고 내 멋대로) 생일엔 세상 쓸데없는 일을 하나씩 해보려고 맘먹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걸 샀다.
이 글은 엄마가 보시면 안 된다. 또 쓸데 없는 걸 샀다고 혼날테니까ㅋ 옆의 커피컵은 사이즈 비교용. By SJ
법랑 냄비. 내 사랑 우리 동네 연희동의 단골 가게에서 샀다. 일본 빈티지를 콘셉트로 다양한 업장을 운영 중인 사장님이 경양식을 테마로 낸 가게다.
나포리탄(케첩+피망 스파게티)부터 함박 스테이키까지 다양한 일본스러운 경양식 메뉴가 가득. 한 켠엔 일본 벼룩시장에서 공수해온 주방용품이 있는데, 몇 개월 전서부터 이 스누피 냄비 세트를 들었다 놓았다 했더랬다. 그리고 2020년 생일의 하등 쓸모없는 일은 이 냄비 구입으로 결정!
난 요리를 잘 안 하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 이미 르크루제 무쇠 냄비를 큰 맘(&돈) 먹고 샀으니 필요가 없건만. 분홍분홍 예쁜 컬러가 눈앞에 아른아른. 어찌 아니 살 수 있으리오.
아직 4시간 정도 남았지만 진정 알찬 생일을 보내는 중이다. 아침엔 위에 언급한 경양식 집에서 모닝세트를 거하게 먹은 뒤 스누피 냄비를 사고, 일요 근무 당번이라 출근을 했다. 기사를 쓰고, 취재 준비를 하고 동영상 취재 밑 작업 등을 한 뒤 지금 한숨을 돌렸다. 8시에 발레, 이후엔 개인 레슨까지 예정돼있으니 아마도 생일이 끝나는 시점에야 집에 들어갈 듯. 집에 아무도 없는 나로선 환상의 스케줄 되시겠다.
어딘지 안 가르쳐주~지, 라고 쓰려고 했는데 창문에 버젓이 상호가ㅋㅋ By SJ
그럼에도 외로움은 보란 듯 나를 비웃고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어제 자정이 그랬다. 케이크 한 판(도 사봤지만 아무리 내가 대식가라고 해도 너무 많았다) 대신 한 조각을 사 와서, ‘환불 원정대’를 틀어놓고 주문을 외는데 급 울컥. 외로웠다. (지난주에 올린 편부터 ‘징징 모드’라 송구하지만 오늘은 생일 찬스.)
사실 맘에 안 맞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보단 혼자가 낫다. 마음이 맞는 특별한 누군가가 없이 평생을 살아간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이게 생각이 났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채 35세 생일을 맞은 캐리. 친구들이 멋진 이탈리아 식당에 예약을 하고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날 나타난 건 캐리 혼자. 다들 차가 막힌다거나 급한 일이 생겼다며 안 나타난 것. 두어 시간을 가시방석으로 기다리다 결국 나홀로 쓸쓸히 귀가. 샤워를 하다 너구리 눈이 됐을 즈음, 샬럿이 나타나 미안하다며 동네 커피숍에서 4총사가 모인다. 그때 캐리의 대사.
지못미 캐리언니. 사랑해요♡
“I am 35, and alone..... I hate myself a little for saying this, but it felt really sad, not to have a man in my life who cares about me. No special guy to wish me a happy birthday--no goddamned soulmate. "
Here goes 의역. “35살이나 먹어 갖고는 혼자라니. 이런 말 하면 너네에겐 미안하지만 나를 진짜 아껴주는 남자가 없다니 진짜 슬퍼.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줄 특별한 남자, 소울메이트인지 뭔지 하는 존재 하나 없는 게 말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해? The end.
(물론, 그 뒤에 샬럿이 “우리가 서로에게 소울메이트면 되잖아”라며 블라블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긴 한다. 개인적으론 사만다의 “Oh shut the fOOk up. I’m 140”라는 대사가 더 좋다.)
언니들 너무 그리워요. [유튜브 캡처]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늘 the Financial Times에서 읽은 기사 중엔 이런 것. 제목이 The Loneliness and Me 외로움과 나, 다.
한국과 달리 영어권 매체들은 기사가 모두 유료다. 그래서 혹시 링크 연결이 안 되실까 봐 일부만 발췌.
Loneliness is our modern curse, and yet who admits to the affliction? For all the news stories about the pervasiveness of loneliness, rarely is anyone identified by name. The shame of loneliness feels like the shame of hunger, of want, of admitting you cannot feed yourself. This is not an epidemic, but a famine. How did it get this bad, for me and for all of us? All the lonely people; where do they all come from? First, ditch the stereotype of the lonely pensioner. The 2018 study found that across the three countries more than half the adults who reported loneliness were younger than 50. They were more likely to be poor and uncoupled. They also, importantly, were struggling with changed circumstances, like recent job loss or a new living situation. They weren’t lonely because they had horrible personalities.
요약 의역: 외로움이란 현대 사회의 저주다. 배고픔, 결핍이 부끄러운 것처럼 외로움도 부끄러운 게 돼버렸다. 외로운 사람, 하면 떠오르는 고정관념은 개에게나 주시길(이렇게 번역하니 개에겐 미안하네.) 늙거나 성격이 나빠서 외로운 게 아니다.
하지만 글 마무리는 이렇다.
Maybe if loneliness is not my fault, then I don’t need to feel so ashamed. Maybe none of us do.
외로움이 개인의 잘못은 아니라는 점. 그래서 부끄러워할 건 없다는 것.
글쓴이는 영국 FT(실소유주는 일본의 닛케이, 즉 일본경제신문이다)의 미국 시카고 특파원. 여성이다.
그래, 외로움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외로운 생일이라고 해도, 케이크를 사다 줄 남자는 없다고 해도 바꿔서 생각해보자. 내가 먹고 싶은 케이크를 살 수 있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고, 내가 마시고 싶은 만큼 와인을 마실 수 있지 않나.
너무 힘들어질 땐 아래 사진을 보면 된다. 손을 잡을 순 없지만 적어도 액정화면의 이 남자는 날 울릴 일은 없지.
누구긴 누구야 미켈레 모로네 [Michele Morrone 인스타]
그래서 나는 오늘, 발레 개인 레슨이 끝나면 나의 소중하고 쓸모없는 스누피 법랑 냄비를 보물처럼 안고 귀가해서 호빵(야채맛이다, what else?)을 두 개 쪄 먹을 작정이다. 그리곤 생일이 끝났음을 자축해야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feat. 윤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