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노력이 아니야

외국어 공부를 가장한 넷플릭스 리뷰 39번째 브런치 by SJ

by Sujiney

‘더 디그’(The Dig)’는 내겐 고고학 드라마라기보단, 사랑 영화다.


올 겨울 넷플릭스의 최고 화제작 중 하나인 이 영화. 이미 보신 분이라면 아마 이들의 관계를 떠올릴 법하다. 여주인공 프리티 부인(캐리 멀리건 분)과, 그에게 고용된 무명의 고고학자 바질(랄프 파인스 분).

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은 chaste, 즉 순수한(=플라토닉 한) 관계.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 감상으론 페기 피고트(릴리 제임스 분) 주인공이다.

절대적 분량으로 보자면 조연이지만, 상대적 비중으로 따지면 그가 남기는 여운은 주연급.


왜일까.

찾아봤더니 역시나. 이 영화는 동명 소설이 원작인데, 원작을 쓴 언론인 존 프레스턴이 실존인물인 페기 피고트의 조카였다.


친척에 대한 애정을 갖고 쓴 캐릭터이니 그가 도드라질 수밖에. 게다가 영화 각본은 2011년작 ‘제인 에어’를 맡았던 모이라 부피니가 맡았다. 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니어도, 자기 주도적 여성, 순응 보단 성취를 중시하는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데 탁월한 작가다.


‘더 디그’의 고고학적 발견의 의미는 이미 다른 많은 리뷰어들이 훌륭하게 다뤄 주셨으니 스킵. 대신 페기에게 집중.


자기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않는 남편에게 항의 중. [넷플릭스]


페기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성인 건 아니다. 뿔테 안경을 쓰고 삽자루를 쥔 그에게 어울리는 형용사는 수더분한, 똑똑한, 차분한, 야심 찬 정도가 되겠다. 그는 남성 중심적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 주도적 여성이었다. ‘더 디그’의 발굴 현장에 선발된 이유 중 하나도 “여성이니 몸무게가 가벼워서 현장 보존에 더 나을 것”이 이유였다.


발굴 현장에서도 그는 따돌림의 대상이다. 그가 발굴 현장의 결정적 유물을 처음 발견하는 날에야 남성 동료들은 그를 인정한다. 그것도, 페기 본인에게가 아니라 남편에게 “똑똑한 부인 둬서 좋겠군”이라며. 일말의 비아냥을 양념 삼아.

키스 안하는 것도 모자라 각침대를 쓰자는 남편. [넷플릭스]

동료 고고학자인 남편마저 그보다는 동료와 어울리는 걸 즐긴다. 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남편의 성적 지향성이 페기와는 달랐던 듯. 같은 방에 싱글 침대가 두 개 있는 걸 보고 페기는 “왜 더블이 아니지?”하지만 남편은 “이게 낫지 않아? 어느 쪽 침대 쓸래?”라고 외려 좋아하는 걸. 뽀뽀도 입만 쪽 맞추는 식이다. 불타오르는 정염(情炎)은 1도 없다.


페기는 느낀다. 관객도 느낀다.

이건 아닌데. 뭔가 잘못됐어.



실존인물에 대해 찾아봤다. 위키피디아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블로그의 상세한 설명에 따르면, 페기 프레스턴은 1936년 런던의 고고학 연구원(Institute of Archaeology in London)의 동급생 스튜어트 피고트와 결혼한다. 페기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재원이었고, 둘은 고고학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며 결혼.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1954년 끝이 나고(이런 표현을 쓴 걸 보니 이때부터 별거를 한 듯), 서류상 이혼 절차도 1956년에 마무리한다.


노년의 페기. 환한 미소가 인상적. 두번째 남편 성이 Guido다.[위키피디아]


페기는 당시 남성 중심적 학계에서도 자신만의 독보적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낸다. 위키피디아 등 자료를 종합하면 그는 “효율적인 발굴 방식 체계를 도입했으며, 현장에서의 뛰어난 리더십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소설과 영화 ‘더 디그’에선 그가 서튼 후 앵글로 색슨 유적을 발굴하던 과정에서 남편과 갈라선 것으로 나온다. 그러면서 프리티 부인의 사촌동생인 로리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인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로리는 소설을 쓴 존 프레스턴이 만들어낸 캐릭터다. 실존인물 페기는 첫 남편과 어쨌든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아이는 없었지만 처음 몇 년은, 적어도 ‘더 디그’의 발굴 현장에선 안정적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셈.


실존인물 페기는 그러나 이혼 바로 이듬해 불타오르는 사랑을 만난다. 이탈리아 시칠리아(aka 시실리)에서다. 상대는 역시 고고학자인 이탈리아인 루이지 귀도. 둘은 격정적 사랑에 빠지고 바로 결혼하는 데, 페기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2년 후 루이지는 심각한 신경쇠약증을 겪게 되고 6개월간 침대에 드러눕는다. 페기가 헌신적 간호를 한 뒤 회복했지만 루이지의 마음은 떠난다. 루이지는 시칠리아로 돌아가고, 페기는 혼자가 된다. 위키피디아엔 페기의 원래 이름인 마거릿을 써서 이렇게 나온다.


“Margaret never heard from him again.”

마거릿은 그의 소식을 평생 듣지 못했다.


나쁜 놈.

뭐, 나름의 사정은 있었겠지.




이런 페기를 구원한 건 일이었다.

아내로서의 삶은 실패했을지언정, 고고학자로서의 페기의 명성은 높아만 간다. 결국 또 사랑에 빠지는 것도 고고학자라는 (according to 위키피디아).


흥미로운 건 말년이다. 페기가 다시 가까워진 인물은 첫 남편 스튜어트라고 한다. 남녀관계가 아니라, 우정을 다져가면서. 1980년대엔 윌트셔 고고학 자연사 학회를 꾸려가고 키워가며 이 학회의 장을 나란히 역임했다고 한다. 페기는 1994년, 영국 남부 도시 바스의 한 병원에서 82세를 일기로 영면한다.



사랑을 배우겠다니. [넷플릭스]

영화 ‘더 디그’의 명장면은 여럿이다. 이 중 페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편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 압권 아닐까. 대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남자 동료들을 따라 이제 파티장으로 재촉하는 남편에게 나 없이 가라며 하는 말.


“We both have our own paths to follow, don’t we? I’ve seen you when you’re happy. You’re rather beautiful.”

우린 각자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어, 그렇지 않아? 당신이 행복해할 때를 봤어. 아름답더군.


남편 왈,

“I’m happy with you.”

난 당신과 있을 때 행복해.


페기: 답변 대신 한숨.


그러자 남편 왈, “I could…I could learn to be.” 행복해질…수 있어. 그렇게 노력할게.


페기는 또 한숨을 쉰 뒤 이렇게 덧붙인다.


“I think that would be an awful shame.”


풀어서 표현하자면

“나와 있으면 노력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니, 그건 내겐 엄청 모욕적인 말인 걸.”


사랑은 빠지는 것.

영어로도 fall in love,

일본어로도 恋に落ちる.


물론, 빠지고 나선 상호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빠지려고 노력하는 건 아니다.


그래, 사랑은 노력이 아니다.

킵해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과 같이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것.




페기는 결국 로리의 사랑을 깨닫고, 전쟁에 징집되어 가는 군복 차림의 그와 사랑을 나눈다. 흐느끼며.

로리와 페기. [넷플릭스]

이 장면이 뼈 때리게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나뿐일까. 로리라는 인물은 작가 프레스턴이 만들어낸 인물. 영화에서라도 행복한 사랑을 하게 해주고 싶었던 듯.


영화에서 프리티 부인은 페기에게 말한다.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간답니다. 붙잡아야 하는 순간이 있어요."



봄이 온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

코로나의 겨울을 뚫고 우리의 삶에도 봄이 오길.

그리고 이 봄엔 다들 치열하게 사랑하기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무엇보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By SJ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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