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 Calm and Ballet On

리뷰 인생 feat. 외국어&발레 by SJ, 47번째 브런치

by Sujiney

고백하건대, 올해 1월부터 와인 반 병 이상 마시지 않고 잠든 날이 열흘이 채 안 된다. 부끄러운 고백은 일기장에나 적지 왜 여기에다 적느냐 – 많은 악멜러님들의 단골 멘트 – 그래도 그 열흘 중 사흘이 이번주였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다.


별다른 계기는 없다.

개과천선도 아니고.

혼술 행오버 때문에 괴로워서, 또 딱히 아니다.


그냥, 발레를 좀 더 열심히 갔다.


넘사벽 테크닉인 그랑 주떼를 뛸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푸에테 16회전을 도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몸에 좀 더 완벽히 집중했다. 아 확실히 3kg은 더 빼야 하겠구나. 왼쪽 무릎이 좀 더 저릿하네. 동시에 들려온 마음의 소리.


너,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거니.


사실 발레학원에 가도 마음이 편하진 않다. 나라는 인간이 워낙 부족한 탓에, 발레 학원 원장님이 나를 계속 왕따 하고 계시므로. 170센티미터가 넘는 나를 콕 집어 뒤쪽 스페어 바(barre)에 가서 하라고 하신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수업 후 핸드폰을 보면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내가 하면 “그냥 집에 가지 그래요?”라고 면박을 주시는 식.


어쩌겠나.

Mea culpa. 다 내 탓이려니, 한다.

예전엔 밤을 새서라도 출석부 정리도 도와드리고, 화분 정리도 해드렸지만 이젠 안 or 못하는 내탓.

그래도 그 분 덕에 여기까지 왔다.


토슈즈, 라고 우리가 부르는 건 사실, 포앵트 슈즈(Pointe Shoes)다. By Choi.s feat. SJ


지난주엔 행불 남편의 고모가 찾아와서 “(남편에게) 용서할 일이 있으면 빨리 용서하라고 했다”며 나를 위로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어이 상실. 내가 용서를 받을 일을 한 기억은 없으므로. 그래도 여전히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 이 또한 다 내 탓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인생이라지.

그렇다면 이왕 사는 게 충실히 사는 게 삶에 대한 최고의 복수다.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나쁜 일(들)이 닥쳤을 때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래서 좋아하는 말.


Keep calm and carry on.


의역을 하자면,

무슨 끔찍한 일이 터졌건 상관없이, 차분하게 하던 대로 하자.


아예 침대 맡에 액자로까지 만들어뒀다는ㅋ By SJ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전설적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남겼다는 말로 종종 오해된다. 전쟁이 터지자 흔들리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나온 문구인 건 맞다. 하지만 처칠이 쓴 건 아니다. 처칠 관련 웹사이트에서 “사실은 처칠이 한 말은 아니랍니다”라고 아래와 같은 설명도 해놓았을 정도. 영국 정부가 대국민 홍보 포스터로 제작을 했고, 한 우체국에 붙어 있던 걸 전후 발견했다는 게 정설.


사실 처칠이 한 말이 아니라는 설명. 윈스턴 처칠 연구자들의 모임 웹사이트 캡처다.


이 문구의 확장성은 대단하다.


사람들은 carry on 대신 각종 다양한 문구를 넣었다. 아마존에선 아예 이런 패러디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이도 있다.


예를 들면 이렇게.

계속 차분하게 파티나 해.

차분은 무슨, 담배나 피워.


아마존에서 퍼옴.


그래서, 나도 하나 생각했다.


Keep calm and ballet on.

차분하게 계속 발레를 하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 역시나 이미 많은 이들이 향유하고 있던 문구였으니.

구글에 나오는 엄청난 Keep calm and carry on 포스터들. 구글 캡처


그래도 나처럼 T셔츠까지 만든 이는 없지 않을까, 자부해본다.


이렇게.

부끄럽...다리 아직도 안 붙는ㅠㅠ By Choi.s feat. SJ


13년 가까이 단골로 다니는 광화문의 편집샵, Choi.s(aka 초이스) 의 사장님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다. 원래 주문 제작은 기본이 100장이거늘, 능력자 초사장님은 2벌, 그것도 하나는 스웻셔츠, 다른 하나는 일반 V넥 티셔츠로 해달라는 내 요청에 흔쾌히 yes! 추가 비용도 스벅 커피 몇 잔 참으면 될 정도로 저렴했다.


그래서 나온 이 티셔츠. 내 보물이다. 분홍분홍한 스웻셔츠는 왠지 좀 부끄럽기도 해서 아주 가끔만 입지만, 이 퍼플 프린트의 화이트 티는 거의 매일도 입을 수 있을 정도.




끔찍한 일들은 일어났고, 일어나는 중이며, 일어날 것이다.


나는 계속 흔들리겠지. 하지만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가보려 한다. 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지 않나. 죽을 용기가 내겐 없으므로. 생명은 소중하므로.


내게 계속 아기 자랑만 하거나, 내 상황을 내 딴엔 힘겹게 고백했지만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지인이 99.999%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그들에게 그렇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내겐 발레가 있고, 나와 전생에 자매가 아니었을까 싶은 초이스 사장님이 있고, 예쁜 옷이 있고, ‘올리브 키터리지’처럼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다독여 주는 책이 있다.


인생이란 건 어차피 씁쓸하기에 ‘La Dolce Via’(달콤한 인생)이라는 말이 나온 거 아니겠나.


그림자가 있어야 빛의 소중함을 알고

비가 와야 햇살 쏟아지는 날에 감사하고

괴로운 일이 있어야 그래도 와인 한 잔이 더 맛있는


그런 게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발레를 하러 간다. 일종의, 수행으로.


벌써 5월.

올해의 3분의 1을 열심히 살아낸 여러분 모두,

대단하다. 응원한다.


Let's keep calm and carry on.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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