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 뵐 낯이 없다. 이 브런치 플랫폼에 온갖 잘난 척은 다해가며 취미 발레 인생에 대해 써왔건만. 최근 학원을 바꿨더니 선생님 가라사대...
“음… 배우지 못한 게 많네요. 일단 기초반! 몇 주 뒤 다시 봅시다.”
선생님… 저, 수년을 했는데요(진짜 몇 년인지는 창피해서 말 못 함ㅠ)?
콩쿠르 수상도 여러 번 했는데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싱가포르 숙소에서도 꾸역꾸역 바 워크를 했을 정도로 발치광이(발레+미치광이) 인데요?
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받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으니까.
우선, 이전 학원에 대한 험담이 될까 노파심에 적는다. 강산이 한 번 변할 세월을 한 학원에서 다니면서, 좋은 경험 많이 했다. ‘보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발레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을, 그리고 몸을, 게다가 마음까지, 바꿔준 경험이었다. 고질적 어깨 통증에 시달리던 퇴근길, ‘자세교정’ 네 글자를 보고 홀리 듯 들어가 결제를 한 일, 아직도 잘했다고 셀프 칭찬한다.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발레다운 발레가 아니었던 거다. 취미로, 건강을 위해 발레를 토대로 만든 그 선생님만의 프로그램이었던 걸, 이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땐 몰랐다. 다른 학원에서 배우면 몸이 비뚤어진다는 말과, 발레 레오타드는 무조건 면스판 기본 흰색만 입고 워머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해서 열을 내야 한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일종의 종교 같은 거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같은 동작을 내내 하려니 다른 것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플리에만 80번을 반복하는 개인 레슨을 6년 넘게 하는데도 발전이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러다 모종의 트러블이 발생했고, 악몽에서 소스라치게 깨어나는 일이 계속되고, 발레 메이트까지 피해를 입는 일이 생겼다. 때가 된 거였다. 시즌1과 작별할 때가.
새로운 시작은 두려웠다.
옛 학원 선생님 말씀대로 다른 곳에 가면 관절이 틀어지고 몸이 망가질까 두려웠다. 다른 학원 학생들은 멋 부리는 발레를 할 뿐, 건강은 외려 해치고 있다는 얘기도 귀에 맴돌았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 학원과의 인연을 끝냈다고 발레 인생을 끝낼 순 없었다. 그러기엔 발레가 너무 좋았다. 더 잘하고 싶었다. 더 즐겁고 싶었다. 더 예쁘고 싶었다.
때는 9월 말. 마침 여름휴가를 소진하라는 독촉이 왔다. 책도 마무리해야 했고, 발레 학원도 제대로 찾고 싶었다. 행동 개시.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던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난 건 회사엔 비밀) 책을 쓰고 난 뒤, 추리고 추린 발레 학원 10곳을 매일 2곳 이상 갔다.
역시, 뜻이 있는 곳엔 길이 있다.
검색과 취재 및 탐방을 하니 꿀팁이 넘쳤다. 나 같은 고민을 나누는 취미 발레인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일명 ‘레사’)까지 있었을 정도. 나 혼자 끙끙댈 필요가 없었던 거다.
땅 속에 머리를 묻고 자신의 문제에 눈을 감아 버리는 타조. 그게 나였음을 절감했다.
Bart Simpson의 발레 움짤 from Google
좋은 선생님만 있다면 어디든 무관. 거주지 및 회사에서 최단거리 이동시간이 1시간인, 평소라면 절대 아니 갔을, ㅂㅊ동도 갔을 정도. 고3 같은 스케줄에 휴가 마지막 날 입이 부르텄다. 마음은, 행복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이 계시다면 메일 주시길. 각 10곳의 장단점과 비용을 짤막하게나마 정리해둔 글이 따로 있으니 다른 곳에 공개 안 하신다는 조건으로 공유 드릴 용의 있음.)
휴가 뒤 결론.
세상은 넓고
좋은 선생님은 많다.
그렇게 난 개안(開眼)을 했다.
발레의 새 세상이 있었다. 그 새로운 문을 열어젖힌 나는, 그렇게 다시 발린이(발레+어린이)가 됐다. 그래서 즐겁다.
발레 인생 시즌1의 여러 교훈 중 하나.
과몰입은 집착이 된다는 것. 계란을 한 바구니에만 담지 말라는 것. 그래서 나는 본진 1곳과 2진 2곳을 정했다. 마음을 다하되, 집착은 말자. 항상 기분 좋은 거리, 바람이 통하는 자리를 남겨두자.
그렇게 새로 생긴 내 본진. 신촌에 있는 이곳의 이름은 귀엽게도 발레조아.
초행길, 찾는데 한참 걸렸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간판을 못 찾겠는 거다. 무리도 아니지. 빛이 바래 거의 글자 흔적도 남지 않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학원 업력 만 20년인 곳이라 간판도 세월의 더께를 입은 거였다. 그럼에도 바꾸지 않은 건, 더 이상 간판으로 광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는 자부심. 믿음 두 배.
쭈뼛쭈뼛 문의를 하는 내게 원장님은 (참고로 진짜 멋지신 유니버설발레단 출신 베테랑 남!자! 선생님이시다) 몇 년 했는지를 물어보시고는 (살짝 깎아서 말했다, 죄송해요 선생님ㅠ), 이렇게 말씀.
“꽤 했네요. 그럼 일단 초급심화반을 들어봐요.”
에이 그래도 발레 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래도 내가 그 전 학원에선 나름 한다는 얘기 들었었는데, 무슨 초급, 이런 마음으로 들어갔던 나.
바(barre) 워크, 즉 발레 바를 잡는 기본 트레이닝 까진 얼추 무난했다. 문제는 그 후, 센터.
마음은 이랬는데,
이미지 출처: Seoul Tanz Station www.seoultanz.com
현실은 이랬다.
미국의 코미디 고전인 Lucy 시리즈의 발레 편.
선생님 말씀하시길,
“자, 오늘은 좀 쉽게 가죠. 발랑세로 시작해서 톰베 파도부레 앙디당 앙디올 턴 하고 샷세 그랑주떼, 마무리 포즈. 그다음엔 반대쪽 똑같이!”
발랑세? 톰베? 앙디당?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ㅠㅠ 그런 내 앞에서 초급심화반 메이트분들은 척척 동작을 해냈다. 전공생인가? 감탄하던 나는 그야말로 감탄만 하고 동작은 못했다. 쥐구멍을 찾던 내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센터를 너무 안 배웠네요. 기초반에서 센터부터 잡고 올라갑시다. 좋아질 거예요!”
좋아질…까요…선생님. 발레 메이트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던 나는 (선생님께서 나 때문에 수준을 낮춰서 진행하셔야 했기에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 발레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어. 춤을 출 수 있게 되는거야♡
야호!
쪽팔림은 순간이다.
내가 센터 바보였음을 이제서야, 가 아니라, 이제라도, 깨닫게 되고,
센터 바보를 탈출할 길을 찾았음에 그저 기뻤다.
물론 조바심도 났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를 포함해 기초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발레는 더디 늘어요. 무조건 많이 해봐야 돼. 창피하다고? 옆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다고요? 천만에. 많이 창피해 봐야 늘어요. 내게 창피한 모습을 많~~~이! 보여줘요. 지적을 많이 당하세요. 그래야 늡니다. 창피함 따위, 버려요! 뻔뻔하게 단, 열심히 합시다.”
그날 난 바로 정기 결제를 했다.
그렇게 약 한달 반 경과. 나는 여전히 그랑 주떼를 뛰지 못한다. 기초 오브 더 기초인 그랑 플리에도 아직도 4번 포지션으로 할 때는 볼썽사납게 뒤뚱뒤뚱. 뒤에선 선생님의 ‘안 돼에~!’ 메아리ㅠ
딱 나다ㅠㅠ
그런데...
신 난 다!
마음을 열고 몸을 열었더니 진짜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아지는 게 보여서다. 해방감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선생님. 국립발레단 (무려!) 솔로이스트 출신으로 (무려 again!) 지도위원까지 역임하신 호아나 선생님을 만난 것도 크나큰 행운이다. 처음 갔던 날, ‘지젤’을 제대로 말아먹은 내게 선생님께선 엄격하되 시원시원하신 티칭의 정석을 보여주시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죠? 그럼 됐어요. 나아집니다”라고 해주셨다. 선생님은 아실까. 내가 그날, 그 말을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발레 수첩’을 따로 만들고 메모를 시작했다는 걸.
발레 선생님들 중엔 명언 부자들이 많다.
발레조아 선생님부터 호아나 선생님은 물론, 익히 알려진 거장 조지 발란신도 그렇다. 최근 국립발레단이 성료한 작품 ‘주얼스(Jewels)’를 안무하기도 한 발란신은 인간으로선 이슈가 많았지만 발레 무용가로선 전설이다. 그가 남긴 명언 몇 가지만 추린다. 발란신에 대해선 언젠가 따로 쓸 예정.
“왜 자신에게 그렇게 구두쇠처럼 굴지? 뭘 그렇게 머뭇거리는 거야? 뭘 그렇게 아껴? 다음에 하겠다고? 다음이란 없어. 오로지 지금 뿐이야. 바로 지금.”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고? 그럼 제대로 충분히 하고 있지 않은 거다. 발레는 절대로 편안하게 느껴지면 안 되는 거야. 편안함은 게으름의 증거야! 100%로는 충분하지 않아. 200%는 쏟아부어야 해. 탕듀 한 번 제대로 하려면 1년 걸리고 그래도 완벽하지 않아.”
구글링하면 쏟아지는 조지 발란신 명언 중 하나. [Google]
탕듀(tendu)는 지극히 간단해 보이는 기본 오브 더 기본 동작이다. 발을 앞으로 뻗는 것, 끝. 하지만 제대로 하자면 끝이 없다. 발레조아 선생님 말씀을 옮기면 “코어는 물론 발바닥 근육 하나하나까지 다 써야 제대로 하는” 동작이다.
만약 최근 신촌역 인근에서 어줍잖게 샷세 동작으로 엉거주춤 걸어가는 여자를 보고 미친 거 아냐, 라고 생각하셨다면, 사과드린다. 나였다. 내 몸으로 그날 배운 동작을 조금이라도 익히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발이 먼저 나간다. 즐겁다. 행복하다.
옛 발레 학원 동료들을 그간 길에서 여러 번 우연히 마주쳤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살도 많이 빠졌네요”라며 격려(?)도 받았다. 감사하다. 사실이기도 하고. 그렇게 빠지지 않던 팔뚝 살에 근육 선이 조금이나마 잡혀 가고, 체중은 3kg 줄었다. 먹는 건 거의 변화가 없는데도.
나의 베프인 광화문 Choi.s 사장님이 고맙게도 이런 사진도 찍어줬다. 스커트는 호아나쌤의 작품♡
화장 및 보정 및 리터치도 안 했음을 어렵지 않게 아실 수 있으실 거다. 까꿍, 하고 보이는 뱃살 덕에ㅠㅠ 그래도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