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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도리진 Dec 01. 2020

이사(移徙)의 의미

우리는 부천에서 안양으로 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도 아니고 서울에는 우리 집이 없다, 도 아니다.

이 글의 부제(副題)는 부천에서 안양으로, 이다.


그렇다면, 왜 '부천에서 안양'인가?

그 지역적 변화는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지역이 바뀌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리셋될 수 있을까?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1975년 3월에 태어난 나는 대학 입학 바로 전까지 서울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연희동, 구의동, 성수동, 압구정동, 잠실.. 그렇게 서울에서만 살던 나는 서울에 있는 교육대학에 입학했지만, 바로 부천에서 학교까지 하루에 4시간씩 4년간을 지옥철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가 부천으로 이사를 간 것은 막내 이모의 권유 때문이었다. '집 값이 싸며, 앞으로 발전할 곳', 이라는 이유였다. 팩트는 돈이 없어서 그 허허벌판에 작은 아파트만 달랑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지금은 엄청나게 발전한 부천은 내가 이사를 갔던 1994년에는 당연하지만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우리에게도 '서울에 우리 집이 있다'는 예능 프로를 찍을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잠실 3단지의 아파트 하나를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작.아.서.싫.다'라며 - 세상에나 - 좀 더 있다가 잠실 5단지의 아파트를 사겠다고 했고, 그러는 사이 아버지의 회사 2개는 부도가 났고, 아버지는 월급 사장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나서 나는 아버지를 초등학교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자, 정말 중요한 교훈을 아시겠는가. 인생은 타이밍이고, 무조건 오는 기회는 붙잡아야 하며, 나중은 없다, 라는 것이다)


어쨌든 집 없는 설움을 딛고 돈을 모아 부천에 작은 집-이름만 아파트인 빌라 같은 아파트-을 사고 그곳에서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 나는 29살 때 엄마를 협박 - 잠수를 타겠다는 - 하여 1년 3개월간 혼자 살아본 후 본가에 다시 들어갔다가 32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대로 부천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게 그렇게 큰 패착이 될 줄 나는 알지 못했지만.


내가 부천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엄마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빠도 결혼하여 신림동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 옆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서 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엄마의 한탄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안하면 나.쁜.년. 이라고 엄마가 말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인생의 목표 중에 하나였던 나는 그렇게 나.쁜.년.은 될 수 없어서 엄마의 시중을 들었다.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든 엄마를 설득하여 밖에 더 다니시게하고, 맛있는 것도 더 많이 사드리고, 더 많이 웃게 해 드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많이 상처 입었고, 내 상처가 가장 컸고, 그래서 엄마를 적극적으로 케어하지 못했다. (사실 맛있는 것만 먹으면 엄마를 생각하고 사가고 했던 나인데.. 엄마는 느리지만 요리를 잘하고 예뻤고, 유머스럽지만 성격이 이상했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엄마에게 가서 말동무해 드리고 가끔 같이 시장 보고, 청소하고 먹을 것 사가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신랑과도 트러블이 많았기 때문에 엄마까지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엄마에게 향하고 있는 원망의 마음도 너무 선명해서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랑은 안양 토박이었고, 모든 친구와 인프라가 그곳에 있었다. 원래 그다지 독립적이지 못한 성격으로, 부천에 있으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다투었고, 너무나 힘들었다. 게다가 엄마가 아프시면서 - 우리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던 오빠를 두고도 -  우리가 엄마를 모시게 되었고, 나는 여러 번 학원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최악이었다.


몇 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겨우 안양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우리의 마음은 정.상.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갔다. 아픈 기억들을 모.두. 부천에 두고 온 듯이 행동했다. 실제로 김포공항에 가느라 부천을 지나가게 되면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신랑! 우리는 부천에 있을 때, 왜 그렇게 힘이 들었지?"

"몰라. 그러게 내 말대로 진작 안양에서 살았으면 그 고생 안 했을 거 아냐."

"엄마 때문에 부천 살았잖아. 알면서 자꾸 똑같은 말 하지마."

"..."

"내가 장모님한테 더 잘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나도 잘못한 게 많지. 엄마도 나한테 그랬지만."


뭐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는 형국이었지만, 요즘에는 그런 말도 꺼내지 않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기억도, 아픔도 무뎌져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긴 부천에서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천에는 심장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세종병원'이라는 곳이 있었고, 신랑은 그곳에서 수술을 받아 완치되었다. 그가 나를 만나게 된 것은 세종병원에서 수술받으라는 하늘의 계시, 였을 수도 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깨어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스무 살쯤에 수술을 받지 않고 도망쳤던 신랑은, 결혼 초에 드디어 무사히 수술을 받았다. 의사샘은 겁쟁이 신랑을 위해 마취 주사를 '신경안정제'라고 속이고 수술하시는 재치를 보이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멋있다. 의사샘이.


신랑은 수술 들어가기 전, 암환자와 맞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뭔가에 대항하는, 항명하는 기분으로.

그분도 어딘가에서 아직 행복하게 살아계시겠지?


우리는 지금도 안양에 산다. 얼마간의 정신적인 여력을 가지고.

행복반 불행반의 반반 세트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그 반을 차지하는 행복의 1/2은 '안양'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안양 덕분에 '작은 리셋'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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