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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도리진 Feb 16. 2022

아직 변하지 못했구나

하루 1시간 글쓰기(2) am 6:15~7:15

아직 변하지 못했구나.

나는 어제 깜짝 놀랐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일기를 쓰고, 에세이 비스무레 한 것을 쓰면서,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성장했다고 여겼다. 업무 중에도 예전에 잘 못하던 부분을 조금이라도 발전적으로 해내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러던 어느 날(어제),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는 아직 건재함을 알았다.


나름 상담 전화(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도 예전보다 잘하고, 교실 정리도 그나마 나아졌고해서 '아, 이제 좀 사람이 되었군. 그간 마늘을 많이도 먹었지. ㅋㅋ'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두 장면에서 나는 무너져(?) 내렸다.


첫째, 며칠간 교실 기둥 뒤를 쓸지 않아(잘 보이는 곳만 급하게 쓸었음) 교실 벽 뒤에서 한 아이가 먼지 뭉치를 발견했다. "샘! 여기 먼지 덩어리가 있어요!"라고 해맑게 말해 주는 친구가 있었다. 어이구. 나는 얼른 달려가서 물휴지로 처리했다. 아.. 창피했다. 나의 게으른 본성을 들킨 탓이었다.


두 번째 장면은 학부모님이 등장하신다. 우리 학원은 2, 3층을 쓰고 있는데, 3층에서 잠깐 커피 타러 내려갔다가 학부모님을 뵈었다. 데리러 오신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오신 것이라 상담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얼른 도망(?) 쳐서 아이의 수업을 마무리하고 내려 보냈다. 당연히 상담은 하지 않았다. 한 5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 돌아보니 내가 왜 그랬나 싶다.




예상하셨겠지만, 나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배우 박정민이 군대에서 정신과적 상담을 받고 30분간 울었던 장면을 보면서, 아.. 이 사람도 이렇군, 이라며 강하게 공감하였다(지금 그의 책 '쓸 만한 인간'을 읽고 있다).


30대 초반 쯤(평생에 단 한 번),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한 두 마디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엄청나게 펑펑 울었다. 그때 울면서 생각했다. 아.. 내가 생각보다 힘들었구나. 그런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구나.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하다,라고 말이다.


나의 심적 외상 제공자는 엄마였다. 박정민을 30분간 울게 한 질문 "혹시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구속을 많이 받았나요?"에 나의 기억도 건드려졌다. 우리 엄마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상대가 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아이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부모의 일관성 없는 대응이다. 잘했을 때도 별로 칭찬받거나 사랑받지 못하고, 잘못하면 넌 원래 이것밖에 안된다, 라는 말을 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잘못한  없는데 아주 크게 혼이 났던 경우다. 그래서 어른들을 그다지 믿지 않는 아이가 되었고, 사람들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보고 헤아렸다. 열등감의 발현이었다.


도전할 만한 치가 있는 일보다 허들이 낮은 편한 일만 택했다. 그러면서 면접을 보면 100% 붙는다고 자랑아닌 자랑을 했다(붙을 만한 곳에만 지원했다).


육체적으로 증상이 올만큼의 트라우마가 나에게 준 선물도 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많이 읽었던 것. 하지만 그때는 지금의 실용서 위주가 아닌 90%의 소설과 10%의 수필로 이루어진 독서였다. 아, 심리학 책도 많이 읽었다. 내가 왜 이런 건지를 너무 알고 싶었으니까.


책을 많이 읽어서 별로 어렵지 않게 대학을 갔고, 그 말발로 인해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대가는 치루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데, 정말 쫌 아팠다.


많이 힘들었지만, 세월과 사람과 책의 힘으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고 있다.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된 것은 남편의 존재가 가장 컸던 것 같다. 결혼의 가장 큰 장점은 심리적 안정이다(단점도 진짜 많음).


완전히 변하지는 못했지만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으니 뭐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공동체에 누가 되지 않고(어머님들은 나를 좀 좋아하신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챙기며 살아가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하트도 받고 있고, 책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다(아직은 구상 단계지만).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싶다.


그러고보니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드문드문 꾸던, 눌리던 일들도 요즘은 일어나지 않는다). 눈치도 별로 보지 않고 가슴이 물리적으로 아픈 일도 없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큰 목소리로 밝게 이야기하지도 않으며(그동안 톤다운이 많이 되었다), 상처받기 싫어서 관계를 먼저 단절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알아가는 만큼, 보듬는 만큼, 우리는 성장해 간다.


변하지 못했어도, 변화하는 중이니 괜찮다.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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