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이진우 교수님의 EBS [인문학 특강]을 엮은 책이다. 니체를 너무나 사랑하는 교수님은 독자들의 허무주의를 타파하고 생의 가치를 일깨우고 싶으셨던 것 같다.
기독교적 가치가 타당성을 상실한 지금, 우리에게는 기댈 곳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이 시대에 만연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신이 죽었음에도 우리에게 가치있고 유의미한 '삶의 양식'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1강 니체는 누구인가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가 일상이 되었고,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이 더 많다. 이런 시대에 니체는 망치를 들고 기득권과 기존의 가치를 때려 부수려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겠다는 것이다. 실존의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위험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안전만을 추구하면 지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믿고 있는 절대적 진리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만든 허구에 불과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마르크스는 정신과 물질의 위계를 뒤집어 정신보다 물질적 관계가 우선이라 했고, 프로이트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니체는 삶이 있는 곳에는 자기를 인식, 확장, 표현하고자 하는 근본적 충동인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2강 신의 죽음, 허무주의를 끌어안다
신이 죽었다, 는 명제는 어떤 의미일까. 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21세기는 세속적 가치로 움직이는 시대다. 모든 사람이 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지금까지 믿었던 가치가 전복되는 허무주의의 시대이기에, 우리는 새로운 즐거움과 가치를 찾아 실존적 물음을 물어야 한다.
신학자들은 허무주의의 도래와 세속화된 욕망이 반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이후의 일이라 말한다. 역사가 흘러가면 세속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심적인 가치가 초월적이고 영적인 것에서 물질로 넘어간다. 생산보다 소비가 중요한 시대, 무엇을 소비하는 지가 그 사람을 설명하는 시대인 것이다.
니체는 자아 또한 실재가 아닌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한다. 자아 탐구보다는 자아를 망각하고 현재 활동에 몰두하는 것이 자아를 만들고 발견하는 길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 자연 선택론을 들고 나와 창조론을 부정했다. 니체는 이러한 문화적 현상과 징후를 '신은 죽었다.'라는 한 마디로 정리했다. 이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신을 만든 것도 우리고, 그 절대적 가치를 더이상 믿지 않게 된 것도 우리라는 이야기다.
신의 죽음은 허무주의를 가져오고, 가치의 전도를 일으킨다. 허나 아무 것도 진리가 아니기에 모든 것이 허용되기도 한다. 허무주의가 일상이 된 지금, 약한 자로서 그냥 받아들이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내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무언가를 시도해보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추구한다. 의미없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가치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진리와 허위의 이원론을 회의한다. 진리라는 것 또한 하나의 해석이나 주장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 진리보다는 정직과 진실성을 중시한다. 끝까지 사유하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해보며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은 '영원 회귀'이다. 모든 존재와 에너지가 반복되어 왔으며,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무한한 횟수로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개념(위키백과 참고)이다. 우리가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사실 늘 반복되어 온 똑같은 고민이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세상 속에서 허무한 만큼 새로운 유를 창조할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
3강 권력에의 의지,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삶은 권력을 지향한다. 권력에는 나름의 논리와 이성이 있으며, 진리를 만들어낸다. 권력은 삶은 움직이는 근본적 동인이다. 전지전능하다고 여겨지는 신은 최고의 권력자이며, 인간의 해방은 신의 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욕망, 충동, 생존, 삶에의 의지와 같은 내면에서 나오는 힘이기도 하다.
생명체가 살아있으려면 끊임없이 바깥 환경과 교류, 소통하고 동화해야 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권력에의 의지이다. 권력은 생명의 근본적인 현상일 뿐이며, 권력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발현 방식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권력의 속성은 첫째, '저항'이 있어야 실현된다. 저항을 받을 때 힘을 느끼게 된다. 둘째, 권력은 다양한 세력의 '관계'이다. 관계가 형성되어야만 권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셋째, 권력은 통일적 '질서'이다. 기득권 세력이 강한 이유는 그 자체가 안정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적 질서가 권력을 이루는 힘이며, 그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가 중요하다.
진정한 권력자는 사랑하는 자, 이다.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권력을 갖고 자유로운 사람을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권력이 흘러넘치는 자의 능동적 사랑은 수동적인 기독교적 사랑(피지배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논리)과는 다르다. 욕망이 없는 상태를 욕망하는 우리는 일단 권력의지를 인정하고 성장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하겠다.
4강 초인, 너 자신을 넘어서라
신은 죽고 절대적 가치는 사라졌으며,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 뿐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양식은 초인과 최후의 인간(마지막 인간) 두 가지이다.
니체가 정의하는 '최후의 인간'은 개성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동경과 이상이 없어서 현실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존재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메뚜기 떼와 같은 군중을 말한다. 최후의 인간은 초인과 대비되는, 스스로를 파괴시킬 수 있는 삶의 양식이다.
니체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간 유형인 초인은 현재의 인간을 극복하는 지점에 있다. '위버멘쉬(초인)'란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인간 유형을 나타내며, 현대인, 선한 자, 그리스도 교인과 다르고,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형이상학적 가치와 결별하고, 우리의 일상적 가치를 폄훼하고 천상의 가치를 주장한 사람과 반대되는 실존 양식을 갖고 있다. 자신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자를 가리켜 니체는 초인이라 명명했다.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창조하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최후의 인간은 성공만을 추구하며 가치를 모른다. '메뚜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초인이 되면 삶의 중심을 다시 찾게 되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여 몰랐던 세계를 만나게 된다. '대지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대중적 가치를 따르는 최후의 인간은 수동적이며 남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믿는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동경이 없이 행복한 상태를 원한다.
초인의 실존 양식은 위험을 추구한다. 자기 스스로 가치(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를 창조해야 하므로 위험하고 힘이 든다. 능동적 창조 과정을 중시하는 니체는 기존의 과정을 넘어서서 일탈하기를 촉구한다. 스스로 만든 목표를 향해 걸어가면, 사물이 아니라 내가 달라지면 세계가 바뀔 것이다.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경건하고 신성하고 건강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