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목표도 없는, 그렇지만 피할 수 없이 회귀하는, 무에 이르는 피날레도 없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실존인 '영원회귀'. 초인의 삶을 설파하며 스스로 목적을 창조하고 삶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내라던 니체는 삶은 사실 아무런 목표가 없이 무한반복 된다고 말한다.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 사상은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이다. 니체는 "무여, 영원하라!" 라고 외치는데, 사실 반복은 역설적이지만 창조의 전제조건이 된다.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이 없다면 새로운 생명도 없다. 삶에 목적도 의미도 없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온전히 삶을 긍정하는 힘을 갖게 된다.
반복되는 삶은 사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개인의 실존은 삶의 주인이 되는 실험을 하라는 명령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삶을 실험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며, 이 말은 결국 위험하게 살라는 뜻이다. 스스로 낮추고 약해지는 과정을 통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로 깨닫는다 하더라도 실천은 어렵다. 지식과 진리가 체화되어 변화를 이룰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니체는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초인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은 우연적이기에 이 순간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내일은 달라지겠지, 나아질거야, 라고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살라는 것이다. 세속적 가치나 도달할 목표를 절대화하다 보면 순간을 놓치게 된다. 순간을 놓치는 것은 영원을 놓치는 것이다. 우리 삶에 언젠가 찍힐 마침표(유한성과 사멸성)를 인정하게 되면, 훨씬 더 책임감 있게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끊임없는 지속이 아니라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 순간을 즐기는 태도이고 순간을 향유하는 적극적인 자세이다.
삶을 미래로 지연시키지 않고 현재를 긍정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능동적이고 영혼이 있는 삶이다. 반복되는 삶을 원할 수 있도록, 다시 태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삶을 살고 행동하자.
6강 세 가지 변신, 너 자신이 되어라
니체는 인간이 정체성을 찾고 자아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세 단계 변신으로 나타낸다. 허무주의가 평범해진 시대에 그에 적합한 삶의 양식,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를 변하게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낙타의 단계이다. 낙타는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도 불평없이 묵묵히 걷는다.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무거운 짐을 감내하고 복종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회사를 다니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것들도 짐이 될 수 있다. 낙타는 바로 짐을 지는 정신, 이다.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짐만 진다면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는 없다.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 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과제를 던진다. 실현하기 어려운 궁극적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이것이 낙타의 단계이다.
두 번째, 사자의 단계의 핵심 명제는 '자유를 원하면 명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의하고 가치를 정립하려 하며, 자유의지를 가지는 것이 사자의 단계이다. 자신을 구속하는 제도, 관습, 규범과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용납할 수 없는 것은 거역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획득할 때 비로소,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사자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부정과 파괴는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자신의 나쁜 면, 약점을 고치려는 의지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나를 확인한다. 자유의지를 가지려면 내가 있어야 하고, 외부와의 다름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면, 사자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질문을 안 던지면 최후의 인간).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가치를 설정하고 명령한다. 그리고 자신을 순종한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똑같이 살지 않고 실험하며 위험하게 산다. 이것이 사자이다.
세 번째는 어린아이의 단계이다. 변신의 마지막 단계는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순수한 긍정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놀 줄 알아야 하며, 낙타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기존 관습을 파괴할 사자일 필요도 없다(이미 이 두 단계는 거쳐왔다). 아이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우상도 만들지 않는다.
You should(이렇게 살아야 해/낙타) > I will(그렇게는 안 살거야/사자) > I am(있는 그대로의 나/어린아이)
유용한 것과 무용한 것을 구별하지 않는 어린아이는 니체의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이상이었다.
사람은 어떻게 본래의 자신이 되는가? 두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어린아이의 자연스러움(삶을 놀이터로 여길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자기 창조의 변신과정이다.
7강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면 춤을 춘다
사실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 니체가 말하고자 한 핵심 사상이다.
춤을 출 줄 아는 사람은 운명을 사랑하는 자이다. 춤을 춘다는 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짐, 위대한 가치, 강철같은 관습과 규범 등을 이겨내고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약점을 콤플렉스로 느끼며 매일 불평만 하는 사람과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극복하고 나아가려는 사람 중에 누가 가볍게 춤추는 새에 가까운 사람인가, 는 자명하다.
삶은 유한하고 무상하지만 짧은 삶에도 의미가 있는 영혼을 추구해야 한다. 여기에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이야기가 있다. 아폴론은 빛이므로 사물을 규정하고 정의 내려며, 허구와 환상을 만들어낸다. 의미있는 환상인 비전과 목표도 보여준다. 하지만 이에 너무 취해 있으면 타인과의 유대감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개별화되어 충돌이 일어난다. 이럴 때 디오니소스(술의 신)가 등장한다. 소통이 필요할 때는 술을 마신다. 서로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모두 하나의 생명체임을 느낀다. 마치 축제처럼. 수많은 고통과 난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 모두 필요하다). 허구(비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도 요구되어지는 법이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운명애). 신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삶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얻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다.
니체는 운명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며, 삶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과 실존과 존재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노력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의미를 부여하며 애쓰며 살아간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며 고통을 너무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실존은 원래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서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인정할 때 치유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외면하고 도피, 망각하면 삶을 좀먹는다).
운명을 사랑하는 아모르 파티는 나의 삶을 살 만하다고 이야기할 줄 아는 태도이다. 필연적인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다. 인식의 모험은 허락되었으며, 새로운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설명할 수 없다면 아는 게 아니다.
이 말을 절감하며, 번거롭지만 이 책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조금은 어린아이의 단계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의 일환이겠지요.
본래의 나를 찾고, 자유로워지려는 발악, 아니 시도입니다.
늘 놀이터에서 살아가는 자의 마음으로 지내고 싶습니다.
요즈음의 삶은 어떠신가요.
니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에 답을 찾으면서 살아가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일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