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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도리진 Feb 01. 2021

29살의 독립

살기 위한 선택


29살에 독립을 했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그 당시의 나는 어머니로 인한 심적 외상이 점점 심해져 몸으로 직접적으로 반응이 왔다. 머릿속 신경이 끊어질 것만 같고, 가슴이 뛰고, 심할 때는 숨을 잘 쉴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아.. 이렇게 조금만 더 있으면 나는 강을 건너겠구나, 싶어서..

엄마를 설득할 방법을 연구했다.


남의 시선을 가장 두려워하는 엄마이기에 결혼도 안 한 딸의 독립을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은근 포기를 모르는 나인데다, 그때는 정말 절박했기에 엄마의 그런 심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엄마, 나 오피스텔(이랄까, 월세방) 계약했어."

"뭐?"

"허락 안 해 주면 나 연락 끊고 잠수 탈 거야. 오늘 밤까지 생각해 보고 말씀해 주세요."


딸이 독립을 해서 집을 나가는 것보다 연락이 안되는 것이 엄마에게는 더 창피한 일이라는 것을 간파한 나는, 결국은 2시간 후에 허락을 받고 계획대로 무사히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방 하나짜리 원룸이었지만 건물 겉은 멀쩡한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자유를 맛보았다. 남자친구(지금의 남편)도 가끔 찾아왔고, 남자인 친구가 와서 나를 유혹하기도 했던 재미있지만 쓸쓸했던 날들을 보냈다. 남친과 싸우고 헤어지려고 PC방에서 새벽 1시까지 버티다 집에 갔는데,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를 만나기도 했다.


밤에는 혼자 침대 매트리스(틀은 버렸다)에 누워 까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 후 1년 3개월 후에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드는데, 엄마에게 생활비도 드리느라 남는 돈이 없었다. 일어 등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강의를 파트로 다닐 때도 있었지만, 그 때도 엄마에게 생활비는 보냈다. 안 보내면 전화가 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밖에 있으면서도 엄마 캐어를 해야 했다(그건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사정상,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빠가 장가를 가면서 엄마가 혼자가 되었기에 내가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의 캐릭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나는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과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중간의 그 어디쯤에서 결혼을 결심했다. 결과적으로는 결혼 후에 가위눌림이 없어졌으니,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나라는 인간의 삶이 그리 쉽게 풀리지는 않는 것이다.

엄마의 단점의 상당 부분을 신랑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신랑이 토끼띠에 O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용띠에 AB형이었다.

그에게 따져 물었다. 왜 속였냐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고.

그랬더니 띠는 내가 오해한 것이고 혈액형은 AB형이라고 하면 여자들이 싫어해서 그랬다고 했다. 세상에.


엄마도 용띠에 AB형이고, 이기적이고 유머러스하고 고집이 엄청 세다. 자기 생각이 다, 인 사람이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외모가 훌륭한 만큼 성격의 단점도 강력했다. 내가 그를 마음에 들어한 이유가 어쩌면 엄마와 비슷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어쩌랴. 나는 이미 결혼을 했고,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임에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엄마와 비슷하니 헤어지자'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혼 이후 두 번의 가출과 수천 번(?)의 싸움을 겪었지만, 4, 5년 이후로는 나름 평안하게 살고 있다. 솔직히 그가 이혼을 안 해 줘서 반 강제로 버텼다. 물론 나는 이상한 일이지만,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독립은 정말로 살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언덕에 세워진 하얀 집에서 벽을 긁고 있을지도 모를 미래를 피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자 방어였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치가 위험 신호를 보내면 꼭 '행동'을 해야 한다. 나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지금 신랑은 안방에서 자고 있다. 확실히 나는 그의 구원을 받았다. 떨어져 지내던 결혼 전의 그는 목소리만으로 나를 살려내던 능력자였다. 그래, 그래서 나는 그를 봐주기로 했다.


그도 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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