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니 그리 어렵지도 않고, 썩 어울린다는 것
오랜만에 헤어스타일을 바꿨다. 내게 어울리는 게 어떤 것인지 정의를 내린 후로부터 줄곧 비슷한 스타일만 고수해 오던 차였다. 머리에 딱 달라붙어 가슴께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답답하고 재미없어 보였다. 꼭 외적으로 내 개성을 표현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재미없었다. 일이 년에 한 번씩은 머리를 했지만, 그건 지금껏 해왔던 스타일을 더 고착화시키는 일일 뿐이었다. 조금 부시시한 생머리에서 차분하고 매끈한 새머리로, 가슴께까지 오는 생머리에서 쇄골쯤 오는 생머리로. 끝이 스트레이트인 머리에서 끝이 살짝 구부러지는 C컬, S컬 머리로. 결국은 앞머리 없는 차분한 머리 스타일이었다.
해보고 싶은데 차마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아 멀리서 지켜만 보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히피펌이 그러했다. 곱슬대며 제멋대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절대 내가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처럼 보였다. 두상에 딱 달라붙어있는 머리카락들이 불쌍해서 조금 자유를 주려하면, 주변에서 이런 말들을 해왔다.
"넌 생머리가 제일 잘 어울려. 그게 너의 분위기에 맞아."
그렇다. 어릴 때부터 단정한 이미지의 대명사였던 나에게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는 히피펌은 어울릴 리가 없었다. 심지어는 학창 시절에 이런 일도 있었다.
"자, 임시 반장이 필요한데... 그래 거기! ㅇㅇ이 네가 반장 해라."
깔끔하게 올려 묶은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얌전하게 앉아있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임시반장을 맡기셨다.
범생이 같은 내게도 봄바람은 불어왔다. 봄바람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 머리카락들을 꼬드겼다. 이제 지겹지 않냐고. 젊은 날은 오래 있지 않으니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봄바람의 마법에 이끌려 동네 미용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전에 용기 내어 히피펌을 도전했다가 다음날 다시 생머리와 조우한 경험이 있기에 뽀글뽀글하게 제대로 말아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동네 미용실을 샅샅이 뒤졌다. 할머니들이 다니는 골목길 미용실에 갈까? 번화가에 있는 핫한 미용실에 갈까? 고민했다. 그러다 리뷰를 하나 발견했다. 나와 비슷하게 펌이 잘 안 걸리는 머리인데, 성공했다는 후기! 심지어 그 미용실은 집 바로 옆에 있었다! 이건 운명이지. 운명이 이렇게까지 나를 밀어주는데도 내 손가락은 예약버튼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망하면 어떡하지?"
단 한 가지의 두려움은 '실패'였다. 이 두려움은 어이없게도 친구의 한 마디로 싹 씻겨 내려갔다.
"망하면 다시 매직해~"
그랬다. 내가 기를 쓰고 고민하고 있는 건 고작 머리였다. 뭘 그렇게까지 비장하게 생각했을까? 망하면 다시 펴면 될 일이었다. 친구의 말에 힘입어 충동적으로 예약버튼을 눌렀다.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놀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래, 일단 저질러야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머리 할 때 가장 떨리는 순간은, 머리를 감고 자리에 앉았을 때다. 수건을 걷고 나니 눈앞에 뽀글뽀글 거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미용사분께 머리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무뚝뚝하던 미용사분도 슬쩍 웃으셨다. 집에 오는 길에 사진만 열 장을 넘게 찍었다. 후기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고, 히피펌을 극구 만류하던 엄마에게도 보냈다. 엄마의 돌아온 답변.
"뭐 나쁘지 않네. 발랄해 보이네."
히피펌은 절대 안 어울릴 거라던 엄마의 말에 주저하던 시간이 아까울 만큼 쿨한 반응이었다. 탱글하게 말린 머리카락을 배배 꼬면서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팔랑팔랑 나부끼는 머리들 따라 나도 기분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머리 스타일을 바꿔서 느껴지는 좋은 기분,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했다는 것. 그리고 해보니 그게 그리 어렵지도 않고, 썩 어울린다는 것.
거울 속에 보이는 나는 더 이상 단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