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회현지하상가 by 장동원
날이 춥다. 짙어진 가을빛도 어느새 불어나가고 있다. 시간이 가고 그에 맞춰 세상이 변하는 것은 항상 겪는 일이지만, 안타까움은 더하면 더하지 줄지는 않는 듯하다. 이렇게 한가득 안타까운 계절이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뷰티인사이드(2015)이다.
굳이 이 영화인 것은 ‘변화’라는 소재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변화는 사랑에도 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 혹은 변덕으로 인해 서로에게 더 좋을 수 없는 사람에서 더는 좋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하고 말곤 한다. 그런데 사람 그 자체가 변한다면? 끊임없는 얼굴의 변화라는 도발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영화는 변하지 않을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낭만적이거나 뜨거운 장면들이 지나고 아주 잠잠한 장면이 등장한다. 끝없이 변화하던 사람을 사랑한 여자가 그녀와 같은 사랑을 한 사람과 대화를 하던 장면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크게 주목하지는 못한 장면이다. 아늑한 뜨개질 용품 가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여자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내겐 그 분위기가 참 맘에 들었다.
영화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뜨개질 용품 가게를 우연히 발견했다. 자주 찾던 헌책방 바로 건너편의 가게였다. 영화 촬영지라며 가게 창에 포스터를 크게 붙여놓았기에 알 수 있었다. 그때 감독이 천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 뜨개질 가게가 있는 곳은 일명 변화가 멈춘 곳, 중구 회현 지하상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회현 지하상가는 참 독특한 장소이다. 명동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 한국은행, 중앙우체국 등 한국에서 가장 바쁜 곳들 발밑에 있지만, 그 바쁨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은행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변하고, 중앙우체국이 고층의 포스트타워로 바뀌었지만, 지하상가는 옛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채 지키고 있다. 레코드상, 우표수집상, 골동품상 등등. 세상 밖에서는 찾기 힘든 가게들이다. 세상이 이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회현 지하에 지금과 같이 지나간 시대의 것들이 모여든 것은 1980년대부터의 일이라고 한다. 그때는 아직 회현의 물건들이 지나간 시대의 것이 아니었다. 1985년 충무로에 있던 레코드 상가가 철거되며 레코드상들이 회현 지하로 옮겨왔다고 한다. 한편 우표의 발행처인 중앙우체국 근처다 보니 우표수집상들이,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골동품상들도 이 아래로 들어왔다. 그들이 지하로 들어올 때까지 사람들은 이 가게들이 파는 것이 과거의 것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90년대가 세상에 가져다준 변화는 너무나 컸다. 정치는 민주화되었고 경제는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기술의 측면에서도 너무 큰 변화가 찾아왔다. CD의 음질이 개선되었고 음악은 혼자 휴대하며 감상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삐삐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컴퓨터와 전자메일의 시대가 곧이어 도래했다. 사람들은 집에 골동품을 늘어놓기보다는 신식기술의 산물을 찾았다. 더는 레코드와 우표와 골동품을 사람들은 찾지 않았다. 거기에 97년에 불어온 IMF까지. 세상 위에서 이러한 ‘옛것’을 파는 가게는 그 태풍에 쓸려나가고 말았다. 모두 다닥다닥 붙어 있던 회현 지하상가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렇게 회현 지하상가는 땅에 묻힌 소중한 타임캡슐 같은 장소가 되었다. 경기가 나아지며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90년대 이전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타임캡슐을 다시 열어 보고파 했다. 그 결과 회현 지하상가는 단순히 음악과 수집품을 파는 곳이 아닌, 지난 시절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또한, 회현상가는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사랑받는 공간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60년대의 올드팝을 들으며 80년대의 희망찬 도안의 우표들을 보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시대를 걷는 경험을 안겨준다.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불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 레코드 상 앞에 서서 삼촌이 듣던 보니 엠 음반이나 어머니의 애창곡이었던 주현미를 찾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 이들 때문일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환전상을 들리거나 다른 면세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바쁘게 지나다니던 외국인들조차 지하상가의 가게들을 들린다. 군데군데 꽂힌 80년대 홍콩 음반이나 옛날 사우디 우표를 보곤 한다. 모든 게 바쁘게 변하는 이 시대에 변화 없이 무언가를 간직한다는 것만큼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내가 쓰는 이 글도 그렇게 당신의 발걸음 잠시 멈춰 세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