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눈오는 날이 그렇게 신났던 것 같은데... 이제는 '폭설' 예보를 보면 신나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당장 출퇴근길 도로 걱정, 회색빛으로 질철하게 물들 신발 걱정. 요 몇해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아, 내 마음이 이렇게 강경하게 돌아선 것을 이제야 알았다.
출퇴근 거리가 가까워 다행이었다. 이번 겨울 첫 폭설 때 몇시간 째 도로 위에 잡혀있는 사람들의 실시간 증언을 읽으며 그저 간접 공포에 떨 뿐이었다. 자정이 넘어도 버스가 제자리라든가, 그냥 자가용을 버리고 걸어왔다든가 하는 소식은 겪지 않아도 물씬 끔찍했다.
퇴근길, 잠깐 걷는 사이에도 운동화 밑창과 발등의 이음새 사이로 젖어 들어오려던 찬 물이 얼마나 짜증났는데. 반쯤 녹아 질척거리는 사람들이 밟고 밟아 새카매진 회색 슬러시같은 길바닥이 얼마나 별로였는데. 무심코 밟은 대리석 연석 혹은 맨홀 뚜껑은 또 얼마나 미끄러워서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온 몸을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눈'은 어릴 적 겪은 환상같은 존재가 못되었다.
무고한 시민 고생시키는 놈!
퇴근한 공무원 긴급 소환 시키는 놈!
온데 만데 사고를 유발하는 눈치 없는 사고뭉치 같은 것!
그 와중에 SNS에 이어지는 '눈 오리', '눈사람' 행렬은 잠시 훈훈해 보일 '뿐'이었다. 강렬했던 올해 첫 폭설은 직장인이 되어버린 내게 좋지 못한 기억만을 남겼다.
오늘도 눈이 왔다. 첫 폭설때처럼 날이 춥지는 않다. 한번 큰 폭설 아픔(?)을 겪고 난 뒤, 모두가 단단히 정비했나보다. 오늘 출근길에는 큰 사고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패딩 밖으로 나온 생살은 모두 베어갈 기세로 차갑던 첫 폭설 때 바람. 오늘은 좀 잦아들어, 약간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침 눈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밤사이 스리스리 내린 눈은 도시의 미운 구석을 모두 덮었더라. 잇장 나간 보도블럭, 직육면체 연석의 날아간 모서리, 아스팔트의 금 간 부분, 떨어진 페인트, 볕에 바래 낡은 어닝. 이 모든게 2cm가량 솜이불로 촘촘히 감춰져있었다.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재질이 같으면 아름답게 느껴진다던데. 눈 덮인 낡은 도시가 그랬다. 나무, 건물, 자동차 모양은 달랐지만 하얗고 보송한 솜 재질로 통일된 도시는 꽤 새롭고 괜찮게 느껴졌다. 매일 다니던 출근길인데도 말이다.
이 잘 오가지 않는 담장 옆에는 고양이 발자국이 쫑쫑 찍혀있었다. 퇴근길까지 그대로 남아있더라. 그 누구도 고양이의 귀여운 점프 스텝 흔적을 밟아 짓이길 수는 없었나보다. 털도 없는 맨발로 눈길을 밟으려니 얼마나 시려웠을까. 오랜만에 길고양이에게 연민의 마음이 솟았다. 거리에 보이던 녀석들이 이 쪽으로 다니는구나. 늦은 밤 고양이가 '오도도' 걷다가 도움닫기를 통해 낮은 담장을 점프한 흔적이 선하게 남았다.
어느 녀석의 발자국일까?
지난 여름에 옆집 계단 밑에서 열심히 울던 새끼 고양이가 아직도 이 근처에 살까?
어미랑 같이 다니던 그 뚱뚱한 고양이일까?
눈과 고양이 발자국. 평소에 쉽게 보기 어려운 존재들의 콜라보에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10cm 가까이 폭설이 왔을때는 마냥 싫기만 하더니. 아직도 발 시려울 고양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내게 약간은 남아있었다. 눈 소식이 끔찍하게만 느껴지는 나의 변화에 놀랐었는데. 아직 눈이 지독하게 싫기만한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