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돌려다오

태국 왕비와 태국 공주? 아니 두 태국 공주!

by 연쇄도전러 수찌

“엄마! 이것 봐! 왓 아룬이라는 사원 앞에 가면 태국 전통 옷 입어볼 수 있대.”

오늘 할 일 찾아보다 참신한 체험 거리를 발견했다. 파랑, 빨강, 황금빛 원색 전통의상에 왕족이나 걸칠 법한 태국 스타일 금 왕관, 굵은 금팔찌, 목걸이까지. 풀세트로 빌려주는 곳이 왓 아룬 앞에 있다.

“오, 예쁘다. 그냥 입어볼 수 있는 거야?”

“아니 돈 내고 빌려 입는 건데, 우리 이거 입을 줄 모르잖아. 거기서 주인들이 옷도 다 입혀준대.”

“괜찮네, 괜찮다.”

왓 아룬 사원 구경도 하고 그 앞에서 태국 옷도 입어보기. 뜬금없는 제안이긴 하지만 엄마도 솔깃해한다.

서울 한강처럼 방콕을 크게 가르는 ‘짜오프라야 강’. 머물던 동안에서 수상 버스로 왓 아룬이 있는 강 서안으로 넘어왔다. 관광객으로 만원이던 강 동쪽보다 조금은 여유로운 분위기. 눈 시리게 화려한 황금빛 왓 프라깨우와 달리 왓 아룬은 흰 바탕에 수수한 그림 장식이 전부다. 왓 프라깨우가 다가갈 수 없는 TV 속 연예인 같다면, 왓 아룬은 주변 사람 중 웃는 얼굴이 예쁜 수수한 친구 같다.


옷 빌려주는 곳은 쉽게 눈에 띈다. 가진 옷 중 가장 화려한 옷 입혀둔 마네킹을 가게마다 꺼내뒀다. 왓 아룬 앞 잔디밭 쪽으로 가자 모여있는 서너 의상 대여점이 바로 보였다. 가게라기보다는 노점에 가까운 ‘전통의상 대여점’. 솔직히 옷은 우리 눈에 비슷비슷하니 보인다. 태국 전통의상 역시 행사별, 계절별로 다양하겠지만, 그런 분류보다 디자인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외국인이 경복궁 앞에서 한복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쌍으로 굴러온 손님, 상인들은 이들을 놓칠 수가 없다. 달랑거리는 장식이 수십 개 달린 도금 왕관을 좌우로 신나게 흔든다. 어차피 가게마다 디자인이나 가격도 다 비슷할 것 같다. 가장 친절하고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아주머니 가게로 들어갔다. 시스템은 예상보다 몹시 간단하다. 의상 색만 고르면 끝. 옷만 고르면 허리띠, 팔찌, 목걸이, 왕관은 아주머니가 알아서 고르고 입혀준다.

“엄마, 옷 색깔만 고르면 된대. 엄마는 무슨 색 입을 거야?”

보라색,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황금색 등. 선택지는 꽤 다양하다. 그래 봐야 엄마 눈은 처음부터 한 의상만 바라보고 있지만. 바로, 빨간색. 이 취향은 꽤 견고하다. 엄마는 늘 ‘빨간색’을 입어야만 사진이 화사하게 나온다고 주장했다. 가끔 엄마 모임에서 나들이하러 갈 때도 엄마는 늘 ‘화사한 빨강’ 혹은 ‘꽃분홍’ 상의를 고집했다.

“빨강 건 엄마가 입을 거니까. 너는 다른 색 골라라.”

심지어 그냥 빨강도 아니고 각도에 따라 금색 자수가 도드라지는 화려한 빨강이다. 어찌 경숙 씨가 이 의상 고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사실 나도 빨간빛이 좋다. 친구랑 온 여행에서 친구가 먼저 저 색을 잡았다면 빼앗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로 친구를 구워삶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니까 양보한다.’

꿩 대신 닭으로 나는 노랑과 금빛 사이쯤 되는 천을 골라잡았다. 즉시 아주머니 두 명이 그 천을 엄마 몸에 가로로 두르고 세로로 감는다. 몇 번 쓱쓱 돌리고 어깨로 남은 자락을 척 걸치니 드레스 디자인이 만들어졌다.

‘흡!’

아주머니가 배에 힘주라는 시늉을 한다. 만국 공통으로 가느다란 허리는 미의 상징인 모양. 아랫배에 있는 공기를 코로 모조리 밀어내자 손바닥만한 장식 달린 허리띠를 윗 허리에 사정없이 감아버린다.

“아이고, 엄마 숨도 못 쉬겠다!”

“참아, 참아…….”

아주머니가 우리 다리를 길게 평가해줬나 보다. 어쨌든, 다리가 실제보다 길어 보이긴 했지만 숨은 짧게 들이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해야 했다. 쉴 틈도 없이 아주머니가 장신구 상자를 꺼낸다. 한치의 예외도 없이 정확하게 샛노란 금빛 도금들이다. 고를 기회는 따로 없다. 한 팔목에 두 개씩 팔찌를 척척 채우고 목에도 굵은 목걸이 하나를 건다. 화룡점정. 금색 헬멧에 50cm도 넘는 뿔을 달아 둔 왕관까지 씌워야 완성이다. 어떻게 보면 우아하고 어떻게 보면 뿔 달린 애벌래 같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이 3분 안에 끝난다. 엄마 옷 입히기 공정이 끝나자 내 차례 역시 같은 순으로 진행되었다. 다 차려입은 모양새를 구경하고 싶지만, 노점에 전신거울이 없다. 휴대전화 전면 카메라를 켜서 왕관 쓴 얼굴을 확인했다. 몸에 감긴 뻣뻣한 천과 무거운 장신구들이 어색하고 이 모든 걸 걸친 내 모습이 낯설다. 그래도 엄마는 좀 나은 것 같다. 엄마 강력한 주장대로 ‘빨강’은 역시 엄마와 잘 어울렸고 은은하게 수 놓인 금색 문양이 걸을 때마다 잔잔하게 반짝였다.

전통 옷 체험, 내가 하자고 나섰지만 의외로 입고나니 약간 머쓱했다. 이 사원 앞 공원에 전통 옷 입은 사람은 우리 모녀뿐. 평상복차림 사람들 사이에서 빨갛고 노란 드레스가 너무 눈에 잘 띄었다. 방학 기간인지 낮부터 구경 나온 태국 학생들도 많다. 그들도 잘 입을 일 없는 전통의상을 외국인이 입고 서 있으니. 눈이 가는 게 당연하다. 가다가도 다시 돌아본다. 다소 남사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왓 아룬 배경으로 어서 사진이나 찍고 벗으려 했다. 엄마 반응이 의외다. 드레스 입으니 더 적극적이다. 잔디밭 위, 수수한 왓 아룬 사원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것은 물론, 같이 사진 찍자는 다른 사람 제안에도 호의적이다.

“Can I take a picture with you?”

지나가던 서양인 관광객이 묻는다.

“왜 왜. 저 사람이 뭐래?”

“우리랑 같이 사진 찍어도 되냐는데? 찍을 거야?”

“그래, 찍자. 찍어준다고 말해.”

이 꼴로 다른 사람 앨범 혹은 하드디스크에 영원히 박제될 생각을 하니 조금 수치스럽다. 엄마는 뭐 어떻냐는 반응이다. 서양인을 가운데에 끼우고 양옆으로 서서 같이 손을 모으는 태국식 인사 자세로 사진을 남겼다. 한번 사진 찍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연달아 사진을 요청했다. 아이들은 관심도 없지만, 부모가 들이밀어 태국 어린이들과 함께 어색한 미소로 찍기도 하고, 놀러 온 여고생들과도 유쾌한 포즈로 사진을 남겼다.

우리 엄마 이제 자세가 거의 연예인급이다. 그들 사이에 인자한 얼굴로 서서 여유롭게 사진 찍혀준다. 의외였다. 주목받는 일을 즐기지 않아 엄마도 그럴 줄 알았다.

‘엄마도 의외로 예쁘게 꾸민 날은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구먼?’

머리 위에 살짝 올려둔 기다란 왕관이 떨어질세라 고개 숙일 수도 없다. 꼿꼿하게 척추를 세우고 사진 요청에 응했다. 불편한 옷과 왕관 때문에 자연스레 태국 공주라도 된 양 태도가 도도해졌다.


그날, 숙소에 돌아와 작은 카메라 화면으로 같이 오늘 찍은 사진을 봤다. 빵 터졌다. 며칠간 태국 한낮을 열심히 누비고 다녔더니 얼굴이 까무잡잡하게 탔다.

“우리, 태국 왕비랑 공주 같다.”

“무슨 소리고. 엄마도 공주 하련다.”

딸만 꾸미는 것 말고 ‘우리 둘’ 모두 예쁘게 꾸미는 시간. 엄마 아닌, 경숙 씨의 진짜 모습을 봤다. 태어났을 때부터 알던 '엄마'라는 사람. ‘엄마’를 걷어내면 경숙 씨는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다. 항상 살림하거나 돈 벌어오는 엄마 모습만 봤다. 30년 같이 살고도 ‘경숙 씨’ 모습을 아직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 엄마도 본인 모습, 취향이 기억나지 않을지도. 오랜만에 우리 엄마가 아닌 ‘여자 혹은 소녀’ 경숙 씨를 엿봤다. 낯선 장소, 의외의 사건에서 엄마 본모습이 엿보이기도 했다. 같이 여행 오기를 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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