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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담다 Feb 13. 2023

김밥은 꼭 붙잡고 싶은 희망이었다.

평범한 아줌마가 어떻게 아이들 둘을 키우면서 동네 김밥집에서 어떻게 20억을 벌었을까?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아주 아주 먼 시골 진도에서 태어났다. 그땐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이었다. 엄마는 자식 들 키우느라 농사일만 하기에 바빴다. 그럴듯한 요리를 할 시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새벽부 터 밤늦도록 일하며 우리 3남매를 키워 내셨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마을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밥을 지어야 했다. 워낙 어렸을 적부터 변변치 않게 먹고 자란 덕분에 내 체력은 저질 체력이다. 왕복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의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다녀오면 체력이 바닥이 나서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엄마는 집에 오면 욕바가지를 하며 나를 깨웠 다. 밥도 안 해놓고 잠만 자고 있다고 말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그 시절 엄마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 후 검정 가방 하나 메고 서울로 상경했다.     


가난이 너무나도 싫었다. 상고 출신인 나는 ‘빌리지’라는 옷 가게에 케샤로 취직했다. 30년 전 ‘빌리지’는 명동에서 가장 유명한 옷 가게였다. 이대에 본사 건물이 있었으며 이대 앞에서 도 모른다면 이상할 정도였다. 나의 서울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난생처음 겪은 서울 생활은 즐거웠다. 정말 즐겁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추석이면 쌀가마 자루에 현금다발을 가득 담을 정도로 손님이 넘쳐났다. 고졸인 난 의류 사업하는 소영언니가 참 멋져 보였다. 새벽에 남대문시장에도 같이 가보았다. 의류 사업하는 일들은 더욱 빛이 났다. 나에게 꿈이 생겼다. 소영언니처럼 MD일을 해 보고 싶었다.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의류 분야에 공부해 보는 것이다.


어쩌다. 그 꿈을 따라 대학이라는 곳에 입학했다.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시급은 2,800원이었다. 그 시급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다. 바로 장학금을 타는 것이었다. 시험이 닥 쳐오면 학교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에 나름 보상도 받았다. 차츰 장학금 액수 도 커져갔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공부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겠다는 꿈은 어디로 갔을까? 외숙모 지인으로부터 건물주 아들을 소개받게 되면서 내 인생이 삼천포로 빠지게 되었다. 가난이 정말 싫었다. 건물주라는 말에 무너져 내린 나! 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하며 생활하는 일은 몹시 힘들었다. 스무 살 갓 넘긴 어린 여자아이가 홀로 감당하기에 벅찼다. 뭔가에 홀린 듯 졸업도 하기 전 결혼하게 되었다. 돈 벌기 힘들었고 그 힘듦을 피해 도망치듯 결혼이라는 안식처로 도피했다.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 홀로 남겨진다는 조급함도 생겼다.   


결혼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눈물로 밤을 새우는 날이 늘어만 갔다. 철없던 나에게 엄마라는 자격증이 주어졌다. 처음인 엄마 자격증! 정말 쉽지 않았다. 남편의 적은 월급으로 동생들 둘 데리고 아이들 둘까지 한집에서 살았다. 거기에 시댁까지... 힘에 부쳤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큰 사고를 당했다. 내 인생에 크나큰 소용돌이가 쳤다. 치료비는 상상 못 할 만큼 필요했다. 늘어나는 치료비에 빚에 허덕이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느덧 감당이 안 될 만큼 빛은 불어나 우울증에 시달리며 모든 것이 절망이었다.     

 

하지만 난 어렸을 적부터 힘든 일은 금방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다. 내가 나름 살기 위해 장착 한 방법이다. 지인이 10년 동안 운영해 오던 김밥집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주위에서 내 일처 럼 모두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억을 선뜻 빌려준 친한 언니, 4천만 원을 내어준 친구, 김밥집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준 지인들 덕분이었다. 그렇게 운 좋게 장사라는 걸 시작하 게 되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김밥집'에서 오픈하자마자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그 대박은 나를 신나게 했다. 힘든 줄 모르고 하루에 12시간, 15시간씩 김밥을 말았다. 앞도 뒤도 돌 아보지 않고 일했다. 그러기를 1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어있던 자리를 살려놨더니 나 가라고 하면 어쩌지! 걱정이 앞섰다. 마침 가게 앞에 1200세대 오피스텔 건물을 짓기 시작했 다. 단, 1년 만에 무언가에 홀린 듯 상가를 샀다. 자고 나면 통장에 돈이 계속 입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난 그 돈으로 뭔가를 해야 했다. 상가를 사고 1년 후 내 상가에 2호점을 오픈했다. 그렇게 난 가게 두 군데를 운영하게 되었다.     


처음 12시간씩 일했던 나는 차츰 내 시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틈틈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시간이 허락할 때 교보문고에 가서 책도 읽었다. 이제는 동네 골목이 아닌 조금 번 화가로 진출하고 싶어졌다. 괜찮은 자리를 찾아 3호점을 오픈했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가게 근처에 맛있는 김밥으로 소문이 났다. 길건너편에서도 구경 오 기도 했다. 근처 김밥집은 리뉴얼을 하기도 했다. 나와 동시에 3곳이 근처에서 오픈했다. 한 달도 안 되어 두 곳은 모두 문을 닫았다. 정말 내가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처음엔 직원 채용 하는 것도 서툴렀고, 직원 관리도 서툴렀다. 지금은 정말 인성 좋은 직원들로 채워지고 있다.     


2020년 1월 뉴스가 떠들썩했다. 바로 코로나 시작을 알리는 뉴스였다. 메르스나 사스처럼 몇 달 후 지나가는 줄만 알았다. 3호점 오픈하고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다. 길거리엔 다니는 사람들이 없었다. 어쩌다 한 두 명 손님이 올 때면 고글에 수술용 마스크까지 끼고 나타났다. 2020년 2월 매출이 바닥이었다. 다시는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매출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웬만한 자영업자들이라면 알고 있던 온라인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참 무지했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알았다. 네이버플레이스를 전혀 알지 못했다. 내 손으로 메뉴하나도 네이버플레이스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케팅, 블로그, 등 많은 수업료를 지불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서야 했다. 블로그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시작했다. 인스타도 시작했다. 검색이 주가 되는 네이버 플레이스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틈나는 대로 맛집 탐방하며 새로운 메뉴를 출시하였다. 전혀 관심 밖이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 들을 가게에서 적용하며 손님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영수증 리뷰가 700개 가까이 쌓이기 시작했다. 매출도 차츰 정상화가 되어갔다.     


코로나 시대에 1,00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지출하며 공부했다. 2년 동안 공부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며 터 득한 사실이 있다. 온라인마케팅만이 우리 매장의 매출을 높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매출을 높이고 브랜딩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다.

그 메시지는 바로 “관계”속에 해답이 있었다. 지금껏 만난 분들, 아니 먼저 브랜딩이란 곳, 높은 매출이라는 곳에 다다른 분들의 노하우다.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관계를 통한 꾸준한 소통이 중요했다.

지금이라도 이야기하면 알 만 곳들도 모두 “관계”를 통한 성공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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