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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갤러리 안으로

프롤로그

by 수카 Sukha
사진 및 편집: 수카


202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책을 기획했다. 별다른 대책도 없이 파리에 가서 살겠다고 결정해 놓고 무엇을 해야 하나 막막해하던 참이었다.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비슷한 일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프랑스어라고는 봉주르 밖에 모르는 내가 일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다 문득 파리 갤러리 탐방기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문학을 공부했고 언제나 글 쓰는 일을 동경했지만, 늘 이런저런 일상에 치여 후순위로 밀어두었던 터라 때마침 좋은 기회 같았다. 어차피 갤러리는 갈 거고 전시는 볼 테니까. 더구나 파리는 모두가 인정하는 예술의 도시 아닌가.


그렇게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파리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갤러리를 여행했다. 생각만큼 쉽고 낭만적인 일은 아니었다. 파리 미술계는 커녕,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낯설었기에 골목들이 익숙해지기만도 한참이 걸렸고 그 안에서 괜찮은 갤러리, 소개하고 싶은 갤러리를 찾기까지 다시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날마다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전시를 보다 보니 하고 싶은 말들이 점차 쌓여갔다. 좋아하는 갤러리도, 추천해주고 싶은 갤러리도 생겼다.


파리의 갤러리들은 한국의 갤러리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갤러리라는 걸 알 수 있는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한국의 갤러리들과 달리, 파리의 갤러리들은 고전적인 파리의 건물들 사이에 숨어있다. 열심히 주변을 살펴야 발견할 수 있는 조그만 간판이 장벽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좁은 입구를 지나면 펼쳐지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공간은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정기적으로 전시가 개최되는 현대미술 갤러리를 주로 다녔지만, 파리는 역사적으로 미술의 중심지였고 특히 20세기 주요 미술 사조들이 많이 탄생한 도시다. 그래서 초현실주의나 누보 레알리슴과 같은 파리의 특정 예술 운동에 집중하는 갤러리들을 통해 살아있는 미술사를 경험하는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더불어 지금 파리는 아트 바젤의 파리 상륙, 초대형 갤러리들의 파리 미술 시장 진입, 대규모 현대미술관들의 개관들까지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파리 최신 미술계의 동향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건 두말 할 것 없는 행운이었다.


갤러리 문을 여는 단순한 행위가 은근히 어려운 일이란 걸 안다. 갤러리는 늘 화려해 보이고 그래서 조금 무섭다. 고등학교 때 처음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갔던 날의 떨리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갤러리에서 일해본 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처음 가보는 갤러리의 문을 열 때면 늘 어딘가 조바심이 났고, 프랑스어로 인사하는 갤러리스트들이 있는 파리의 갤러리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저 문 하나를 앞에 두고 발걸음을 돌리기엔 갤러리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각각의 갤러리들은 자신만의 예술에 대한 철학과 취향을 바탕으로 작품을 고르고 전시를 기획한다. 각자의 결대로 큐레이팅된 작품들은 다채롭고 생생하며, 때로는 미술관의 작품들보다 훨씬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미술을 좋아하고 동경하게 된다면 갤러리에서는 미술과 친구가 된다. 그저 갤러리들을 열심히 다닌 것뿐인데 어느새 파리의 미술이 친숙해진 나처럼 말이다.


한국의 미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나와 함께 파리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 파리의 예술 현장을 느끼고 갤러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몰랐던 파리의 갤러리와 미술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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