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좋아하는 갤러리를 찾는 '결'

세미오즈 Semiose

by 수카 Sukha


20230811_145413_Crop_resize.jpg 세미오즈 갤러리, 사진: 수카


좋은 갤러리를 가늠하는 데는 객관적 기준이 있겠지만, 좋아하는 갤러리를 헤아려보는 일은 결에 달려있다. 갤러리마다 흐르는 고유의 결은 때로 묘사가 지나치게 많은 고전 소설 같고, 단어마다 의미가 풍부히 이어지는 시 같기도 하며, 재미만을 위한 통속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레에 위치한 갤러리, 세미오즈(Semiose)는 유머가 가미된 산문 시나 밝지만은 않은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읽힌다. 2023년 말, 세미오즈에서 열렸던 필레모나 윌리엄슨(Philemona Williamson)의 개인전 《순수함의 경계 The Borders of Innocence》은 세미오즈의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자신의 작업을 ‘시각적 시(visual poems)’라고 표현하는(주1) 윌리엄슨은 추상화가 대세였던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이야기에 대한 열망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그렸다. 선명한 핫핑크와 자주색, 짙은 노랑과 파랑...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색들과 드로잉 같은 평면적 인물 묘사, 현실과 환상이 섞인 배경은 독특하고 유쾌하면서도 살짝 기괴한 매력을 풍긴다.


20231220_143257__resize.jpg 세미오즈, 필레모나 윌리엄슨 개인전 《순수함의 경계》 전시전경, 사진: 수카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윌리엄슨의 부모님은 맨해튼에 사는 부유한 백인 가족들의 상주 가정부와 운전사였다고 한다. 자신에게 친절했던 백인 가족들 덕분에 윌리엄슨은 호화로운 부잣집에서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이후 흑인 학교에 진학한 후 평범하게 자란 다른 흑인 아이들과의 차이를 계속해서 지적당하며, 미처 몰랐던 인종적 처지와 특수했던 유년시절의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주 2) 윌리엄슨은 그 후로 백인과 흑인이 함께 어울려 노는 순간들을 표현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어린 시절의 보상이나 흑인으로서 겪은 울분의 표출이라기보단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그녀의 바람이다. 윌리엄슨은 그림 속에서 자신은 흑인 여자아이도 백인 남자아이도 될 수 있다며, 자신의 세계는 인종과 젠더, 계급의 경계 없는 희망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주3)


20230909_161559_light_resize.jpg 세미오즈 프로젝트룸, 호세 보넬 《어린 화가의 장면들》, 전시 전경, 사진 : 수카


세미오즈의 초입에는 젊고 실험적인 작가를 소개하거나 기존 작가의 소규모 작품들로 전시를 꾸릴 때 사용하는 프로젝트룸이 있다. 이곳에서 열린 스페인 작가 호세 보넬(Jose Bonell)의 전시 《어린 화가의 장면들 Scenes from Painterhood》에서도 윌리엄슨의 회화처럼, 약간의 기괴함이 섞인,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같은 회화를 볼 수 있었다.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놓은 듯한 벽 위에 걸린 작품들에는 기다란 손으로 칠판에 낙서를 그리는 모습, 연보라 줄무늬 잠옷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 날아가는 종이비행기, 수많은 손이 감싸 안고 있는 뒷모습 등의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벽지의 무늬가 너무 무서워 보였던 기억, 칠판에 그렸던 의미 없는 낙서들, 친구들과 했던 놀이와 같은,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장난끼와 유쾌함, 공포와 환상들이 떠올랐다.


압축적으로 제시되는 프로젝트 룸의 전시는 규모가 큰 작품들로 힘 있게 표현되는 메인 전시로 이어지는 도입의 역할을 한다. 보넬의 전시가 열렸을 당시 열렸던 메인 전시는 프랑스 작가 로랑 프루(Laurent Proux)의 개인전 《햇볕에 그을림 Sunburn》이었다. 프루의 작품들은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라는 점에서 보넬의 작품과 공통점이 있었지만, 화면 하나하나에서 뿜어내는 강렬함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20230909_162909_crop_resize.jpg 세미오즈, 로랑 프루 개인전 《햇볕에 그을림》, 전시전경, 사진: 수카


로랑 프루는 2009년부터 세미오즈와 여러 차례의 전시를 함께 해온 작가다. 그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게 변모해 왔지만 길게 늘어진 신체와 공장, 사무실, 작업실 등의 노동 공간이라는 소재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햇볕에 그을림》에서 로랑 프루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예술기관인 카사 데 벨라스케스(Casa De Velázquez)에서 작업한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이 화면들에서 태양열이 쏟아지는 마드리드의 지중해성 기후를 느낄 수 있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태양 빛과 붉게 익은 늘어진 신체들, 권태와 여유 어딘가에 존재하는 표정들은 단숨에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유롭게 존재하는 사람들 옆으로 모든 옷을 갖춰 입고 옷을 만드는 의류 공장의 노동자들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자연 속 나체들이 만들어내는 원초적 느낌과 일말의 성적인 느낌도 느껴지지 않는 노동의 현장은 결이 너무 달라 언뜻 다른 작가의 작품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휴식과 노동, 본능과 이성, 욕망과 절제 등, 대비되는 두 화면은 인간 삶의 양분되는 속성에 대해 사고하게 만들었다.



20230811_145432_resize.jpg 세미오즈 프로젝트룸, 세바스티앙 구주 개인전 《쉿》, 전시전경, 사진: 수카


이렇게 세미오즈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사회적, 미학적 주제를 고찰하게 만드는 작업을 선보인다. 프랑스 작가 세바스티앙 구주(Sébastien Gouju) 개인전 《쉿 Hiss》 또한 장식 미술의 위치에 대한 비판을 은근히 제기하는 전시였다. 세바스티앙 구주는 미학적으로 천대받아왔던 장식 미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일깨우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장식이 법과 권력의 의미를 표상하며, 따라서 장식적이라는 형용사는 고급 예술과 하위 예술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전복적 힘을 지닌다고 바라본다. 그리고 이 맥락 때문에 모더니즘 미술에서 장식성이 배제되었으며, 결국 사람과 자연의 특색이 없어진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주4) 그래서 세바스티앙 구주는 일상적이고 가정적인 오브제들을 선택하고 수공예와 장식 미술의 기법을 활용하는데, 프로젝트 룸에서 열렸던 이 전시에서 구주는 『어린 왕자』 속 장미처럼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색색의 꽃들, 짙은 초록과 갈색의 덩굴과 파스텔 색상의 뱀 조각들로 작은 공간을 장식했다. 구주의 작업은 장식 미술의 역사와 현 위치를 비판하지만, 공격적으로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기보다 장식 미술과 순수 미술의 경계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다.


당시 메인 전시로 열렸던 영국 작가 리처드 우드(Richard Woods)의 개인전 《수확 Harvest》도 비슷하게 자연이라는 소재에서 출발하여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경계에 있는 작품들이었다. 다만 섬세한 장식인 구주의 꽃과 달리 우드의 작품들은 상업적이고 디자인적이었다. 우드는 나무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을 지속해 온 작가로, 그는 자연스럽고 따뜻한 원래의 나무의 성질과 달리 인공적이고 진한 색상들을 사용하여 디자인적인 외형을 만든다.


20230811_145324_resize.jpg
IMG_20230819_000440_248.jpg
세미오즈, 리처드 우드 개인전 《수확》, 전시전경, 사진: 수카


처음 세미오즈를 방문한 것도 그의 나무 작업이 주는 독특하고 낯선 느낌 때문이었다. 세미오즈의 본관은 길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다니다 갤러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골목길에 쇼윈도이 있다. 평범한 쇼윈도와 달리 투명한 유리창 중앙에 두 개의 두꺼운 나무 기둥이 있는데,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오래된 나무 기둥 사이로 보이는 인공적이고 다채로운 색상들로 칠해진 나무 패널들이 모여있는 이미지가 신선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본 직사각형의 나무 패널이 아닌 나이테가 보이는 통나무의 동그란 단면이 새하얀 벽면에 걸려있었는데, 짙고 탁한 색상과 두꺼운 윤곽선, 강렬하고 짙은 색상은 그대로였다. 안쪽 공간으로 들어서자 나무 패널들로 가득 채워진 벽면과 그루터기 의자들도 있었다. 나무의 자연색과 상반되는 인공적인 색들과 두드러지는 윤곽선에서 오는 평면성은 만화 속 이상한 숲을 연상시켰다. 우드는 이러한 ‘사실적인’ 색감을 유지하기 위해 산업용 색상만을 조합 없이 사용한다고 한다.(주5) 그의 작품들은 굉장히 상업적인 인상을 주고 실제로 작가는 팝아트와의 관련성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여러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젠트리피케이션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


20241023_154028_resize.jpg 세미오즈, 모팻 타카디와 개인전 《반전된 거래》, 전시전경, 사진: 수카


한편 가볍게 문제를 던지는 우드의 작품과는 달리 더 직설적으로 사회적 문제에 발언하는 작가도 있다. 바로 2024 베니스 비엔날레 짐바브웨관의 참여 작가이자 세미오즈의 다른 전속 작가인 모팻 타카디와(Moffat Takadiwa)다. 타카디와는 《반전된 거래 The Reverse Deal》에서 버려진 칫솔 머리, 키보드 자판, 치약 튜브 등을 활용해서 전통적인 태피스트리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짐바브웨의 수도인 하라레의 음바레(Mbare)라는 지역에서 작업하는데, 음바레는 비공식 경제활동이 활발한 도시로 많은 주민들이 폐기물 수집과 분류, 재판매 등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환경을 보호하고 자원을 재사용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이 상황은 열악한 노동 조건이라는 부정적인 측면과 맞닿아있다. 그런 음바레의 특수한 상황을 타카디와는 전통적으로 상류층의 집안을 장식해 왔던 태피스트리로 제작하여, 명백하게 계층의 불평등, 소비주의와 환경 문제를 비판한다.


세미오즈는 "취향과 문화적 위계를 향한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문화의 민주화를 촉진하고 싶다"라고 말한다.(주6) 나는 이런 세미오즈의 결을 좋아한다. 세미오즈에서 전시되는 작품들에는 압축적이고 상징적이지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서사가 느껴지고, 단순해 보이는 표면 아래에 드러내놓고 소리 지르지 않는 메시지가 있다. 언제 방문하던 말끔한 디자인 인쇄물과 배치, 정돈된 전시 공간과 흐트러짐 없는 디스플레이. 작은 구성 요소들이 모여서 만드는 공간의 고요함은 작품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극대화하며, 세미오즈 특유의 '결'을 완성한다.



주 1) 세미오즈, 《순수함의 경계 The Borders of Innocence》, 전시 서문

주 2) State of the Arts Season 41 Episode 6, “Philemona Williamson”, PBS, Aired: 03/29/23

주 3) 위의 방송

주 4) 마르크 라소(Marc Lasseaux)와의 인터뷰, “장식 속에서의 왈츠 Une valse dans le décor”, 2018, 작가 홈페이지

주 5) Marie Maertens, 《Harvest》, 전시 서문

주 6) 세미오즈와의 인터뷰





세미오즈 Semiose
44 rue Quincampoix 75004 Paris
화-토 11:00-19:00
T + 33 9 79 26 16 38

@semiosegalerie
https://semiose.com
info@semiose.com




인스타그램 @galleryinparis @borongram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리 갤러리 안으로"는 매주 한 편 업로드됩니다. 제 브런치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발행 즉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keyword
이전 06화좋은 갤러리의 필요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