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동거 _ 1.
만약, 이라는 물음은 많은 결정을 바꾸어 버린다. 이를테면 만약 지금 남자 친구와 국제결혼을 한다면, 만약 평생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된다면, 만약 엄마를 일 년 아니 몇 년에 한 번씩 밖에 못 보게 된다면과 같은 가정들. 실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순간의 불안으로 치부하고 지나칠 수 없는 이 물음들에서 시작되었다. 8년 6개월만의 엄마와의 동거는.
"사람은 서울을 가야지." 제주 감귤을 원껏 먹으며 공부하고 주말에는 말도 탈 수 있을 것 같아 제주대에 가고 싶다는 막 수능을 마친 철없던 고등학생은 엄마의 단호한 말에 떠밀려 서울로 보내졌다. 자연이 좋다는 소심한 발언 역시 도시를 경험해본 후 자연으로 가도 늦지 않다는 말로 일축되었다.
그렇게 살게 된 서울은 낯설었고 무서웠고 또, 외로웠다. 그래서 나의 스무 살은 고향에 내려온 뒤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 좌석에 앉아 창 밖으로 엄마와 아빠를 내다보며 엉엉 울던 기억, 별 일도 없었는데 매일이 서럽고 무서워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자취방에서 훌쩍거리던 기억 등 짠맛으로 가득 덮여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또 대학원마저 모든 학기를 마친 그 세월 동안 어느새 내게 서울은 고향인 대전보다 익숙한 곳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올해는 그렇게나 낯설었던 지하철 역 앞에 떼를 지어 온갖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사람들과 그보다도 더 낯설었던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 사람들을 휙 지나치는 바쁜 서울 사람들이 더 이상 차갑기는커녕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정신없이 석사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하고 병행하던 일마저 끝이 나갈 때쯤 잊고 있었던 문제가 크게 다가왔다. 대학원을 시작하며 계약했던 자취방의 계약이 끝난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의 세 번째 집이었던 그 방은 특별한 곳이었다. 부모님이 골라주었던 첫 번째 집과 대학교 개강을 코 앞에 두고 급하게 구했던 두 번째 집과 달리 내가 돌아다니며 직접 구한 집이었기에. 번화가에 위치해 근처에 독특하고 예쁜 가게들이 많지만 또 너무 한가운데는 아니어서 평화로운 그 동네에 살면서 나는 서울도 또 다른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로 조금씩 모은 돈으로 취향을 가득 담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방도, 이제야 여유가 생겨 하나둘씩 다니던 각종 문화생활들도 마음을 붙이는데 큰 몫을 했다.
그래서 사실은 서울에서 더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집 계약 만료되면 어디서 살 거냐며 엄마한테 걸려온 전화에 내 입은 "내려갈 거야."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심지어 공부하고 취업하는데 서울에 있는 게 도움되지 않겠냐는 엄마에게 아니라며 안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기까지 했다. 모두가 그 만약, 에서 출발한 생각들 때문이었다. 흐릿했던 상상은 남자 친구와 만나는 몇 년의 시간 동안 점점 구체적으로 변했고 어느새 나는 '시간이 있을 때 엄마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미래의 나를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만약의 물음은 내 결정을 바꾸어 버렸고 나는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엄마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