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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카 Sukha Sep 15. 2020

일상

각자 그리고 같이



엄마와의 동거 _ 2.


오늘은 엄마와 산지 53일째 되는 날이다. 한 달 하고도 2주가 흘렀다. 이삿짐 정리다 뭐다 정신없던 나의 매일도 어느새 규칙적인 하루하루로 자리 잡았다.



아침

나는 잠에서 깬다. 그날따라 일찍 눈이 떠졌다면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유튜브에서 DANO 채널의 눈뜨스(눈뜨자마자 스트레칭) 영상을 따라 하고 거실로 나간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서 김연아 커피(맥심 화이트 골드)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거나 아직 안방에서 자고 있다. 엄마가 일어나 있다면 잘 잤냐고 물어보고 어젯밤 만들어놓은 오나오(오버나이트 오트밀)를 같이 먹는다. 잠깐 아침 뉴스를 보며 떠들다 보면 요가에 갈 시간이 된다. 같이 요가복으로 갈아입고 집 앞 요가원으로 향한다.



요가 수련

엄마와 함께 운동을 다니는 건 어딘가 쑥스러우면서도 든든한 일이다. 낯을 많이 가리는 탓에 처음 간 운동에서는 뻘쭘하게 있기 일쑤인데 엄마와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개의치 않을 수 있다. 내 편이 있다는 느낌.


요가가 끝나고 우리는 종종 장을 보러 가거나 집 앞 과일장수에게서 싼 과일을 산다. 혼자 살 때 욕심에 갖은 식료품을 사서 낑낑대며 들던 것과 달리 엄마에게 무겁다고 투정도 부리며 하나씩 장바구니를 나누어 든다. 집으로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조금 쉬다 보면 어느새 점심때가 된다.



점심

점심은 보통 엄마의 몫이다. 가끔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내가 요리하기도 하지만 그동안 엄마 밥이 꽤나 그리웠던 건지, 엄마의 밥해준다는 말에 '아냐 내가 할게'라는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자취하며 해 먹었던 음식들은 보통 볶음밥, 파스타, 볶음밥, 파스타, 계란말이, 볶음밥, 파스타, 볶음밥 등. 단조로운 변주만 있을 뿐이었던 내 요리와 달리 엄마의 요리는 다양하다. 목살을 크게 크게 잘라 넣은 김치볶음밥, 민물고기와 시래기를 넣고 끓인 민물 매운탕, 토종닭을 푹 끓인 닭백숙, 직접 무친 열무김치를 넣고 만든 열무 비빔국수 등. 덕분에 약 6주 만에 4kg이나 늘어났지만, 엄마는 "때깔이 확 좋아졌네"라며 흡족해하는 것 같다.


내가 뒷정리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엄마는 나를 부르며 "커피 한잔 부탁해~" 한다. 엄마의 하루 믹스커피 섭취량을 줄이기 위해 꼬박꼬박 핸드밀에 원두를 넣어 갈고 드립으로 커피를 내린다. 그렇게 엄마에게 드립 커피 한 잔 갖다 준 후 나는 내 몫의 커피를 한 잔 들고 방으로 향한다.



우리의 같이 보내는 오전이 이렇게 지나고 오후 1,2시 경이 되면 우리는 각자의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방 안에서 공부를 하고 엄마는 거실에서 엄마의 해야 할 일들을 한다. 가끔 심심하거나 텀블러에 물을 채우러 거실에 나갈 때면 몇 마디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다시 또 방으로 돌아와 각자 할 일을 한다.



저녁

급하게 찐 살을 뺀답시고 저녁을 안 먹겠다는 나를 엄마는 갖은 음식으로 유혹한다. 맛있는 음식을 한 상 차려놓고 "이것만 먹어봐", "같이 먹자. 혼자 먹으면 무슨 재미냐." 등. 나는 거절하다가 유혹에 넘어가서 몇 입 먹고 정신이 든 후 엄마 탓을 한다. 그렇게 조금 투닥거리다 분위기가 정말 안 좋아질 것 같을 때면 나는 잽싸게 웃으며 말한다. "알았어, 맛있었으면 됐지! 대신 내일부터는 진짜 뭐 먹으라 하지 마?" 엄마는 슬쩍 대답을 미룬 채 말한다. "같이 산책이나 갈까?"



산책

우리는 같이 집 근처 천을 따라서 걷는다. 동네를 구경하며 "여기 빵집이 새로 생겼네.", "저 병원은 실력이 별로더라." 등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속 안에 담아두었던 깊은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각자 나름의 생각에 잠겨 발걸음만 같이 하기도 한다. 그렇게 적당히 걷다가 발이 슬슬 아파오면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오면 우리는 언제 우리가 같이 걸었냐는 듯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엄마는 뉴스나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정리하고 나는 낮에 못다 한 할 일을 마무리하고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한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잘 때가 되었을 때 나는 다시 거실로 나가 괜히 엄마를 졸졸 따라다닌다. 엄마는 귀찮게 하지 말라면서 그럴 거면 이리 와서 파스나 붙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의 등에 파스를 붙여주고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안방으로 간다. 각자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보다가 잠에 든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 이 일상은 내겐 너무 신기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잤냐고 물어볼 수 있고 이 동네에 새로 생긴 빵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일상. 귀중하고 소중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의 엄마이다. 나는 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 속에서 조금씩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다. 엄마와 싸울 때 나는 종종 "엄마는 나를 너무 몰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나도 엄마를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엄마는 밸런스 조절에 약해서 우리의 각자의 시간에 하루는 열과 성을 다해 온 에너지를 쏟고 그다음 날 그 여파로 아프거나 휴식을 취하기 일쑤고, 점심은 어제도 국수 오늘도 국수 내일도 국수를 먹고 싶다고 할 만큼 국수를 좋아한다. 이 작은 것들이 재밌고 신기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새로 알아가는 기분. 이 각자 그리고 같이 보내는 하루하루는 몇 년 후에 어떻게 기억될까. 다신 못 올 순간이겠지? 나는 자주, 이 일상이 애틋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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