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바쁜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파문 없는 일상에 새 물결이 찾아오길 바라며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썼건만 막상 찾아온 변화를 반기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휩쓸려갔다. 처음으로 주 5일 일하는 정식 직장을 갖게 되었고 이를 위해 단 한 번도 살아볼 거라 상상도 못 해본 도시에 이사를 왔다. 이 곳에 발을 들인 지 겨우 일주일을 막 넘긴 지금 나는 중심을 잡으려 바삐 균형 잡기를 하고 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도통 남쪽 지역이랑은 인연이 없던 내가 처음 이 도시에 왔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여름날이었다. 나는 당시 일하던 갤러리의 소장품을 미술관 소장품으로 반입하고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이 곳, 창원에 처음 왔었다. 계약이 잘못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해있던 나는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가 원망스러웠다. 힘들이지 말고 택시를 타라는 갤러리 디렉터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무슨 고집이었던지 잔뜩 젖어있던 바지 밑단을 이끌고 꾸역꾸역 버스에 올랐다. 품 안에 있던 서류들이 젖을까 손에 힘을 더 꽉 준 채로. 버스는 만원이었다. 비가 와서 그랬을까. 성을 내며 출발하는 듯한 버스의 움직임에 속이 울렁거렸다. 원체 멀미를 잘하는 터라 서울에서도 늘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타던 나였다. 점심으로 먹은 김밥이 올라오는 듯했다. 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난 절대 이 곳에서는 못 살겠다. 그때 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도시의 미술관에 지원서를 냈을 때도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나는 그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실 도시에 대한 어떤 부정적 기억도 없었고 순전히 비 오는 날 버스의 험한 운전 때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전화 너머로 들리는 합격 하셨으니 서류를 갖고 며칠 몇 시에 미술관으로 오라는 소리를 들으니 비오는 날 버스에서 하던 그 생각이 떠올랐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어떻게 그 여름날 갔던 많은 도시들 중 그 생각을 했던 딱 하나의 도시에 살게 될 수가 있을까.신기했지만 전혀 싫지 않았다. 그저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살게 된 이 도시는 낮은 집들과 넓고 직선인 도로가 있는 곳이다. 가끔은 정말 친절하게때로는 세게도 들리는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한적하면서도 따뜻한 공기가 내려앉은 곳이다.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바다가 가까이 있는 곳이다. 나는 이 곳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장대비가 그치고 햇살 속에 있는 이 도시는 따뜻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있고 싶었던 내게 갑자기 찾아온 독립이라는 시간이 덜 외롭게 느껴질 만큼. 그래서 나는 아직 새로운 집에, 새로운 직장에, 새로운 사람들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곳에 오게 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대 이 곳에서는 못 살겠다고 느꼈던 단 하나의 도시가 행운이 되다니. 역시,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첫인상은 안 좋았지만,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날 안 좋게 생각 말고품어줘. 이 도시에게 슬쩍 부탁해본다.지금의 좋은 느낌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사실이 되기를 바라도 본다. 인생의 새 물결이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길. 열심히 떠밀려가봐야지, 다짐한다.
새로운 시작의 시간에 서서.
이번 주글은 사실 지난주 업로드가 없었던 것에 대한변명입니다. ㅎㅎ 갑작스러운 이사에 새로운 직장에 정신없는 날들이었어요. 실은 아직도 그렇지만 브런치에 글을 못 올린 게 마음에 계속 걸려 짬을 내어 일기 같은 글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