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생존일기

잊지 못할 날

고성 속초 산불현장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by Sukhwan Heo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할 날이 올까 생각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도 난 좁은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고 작은 화면을 통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기록 해 놓고자 한다.


오늘 2019.4.4 저녁 7시경에 강원도 고성군에서 발생한 산불. 우리가 잠시 일을 보러 나갔다가 들어올 때만 해도 속초에서 우리 동네 천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다 7시 30분쯤부터 미친 듯이 재난 문자가 오기 시작한다.

산불이 강한 바람과 함께 어마어마한 기세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 불과 몇 킬로 떨어지지 않은 원암리와 용천리 등지에 어마어마한 불길이 치솟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우리도 다급하게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몇 가지 물건들을 차에 챙겨두고, 상황을 계속 지켜보기로 한다.

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파출소는 어느덧 인산인해. 대피소의 위치를 물어보는 사람들로 이미 가득하다.

근처 경동대학교 근처까지 불이 번진 탓에 이미 학생들은 짐을 꾸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이제 갓 20살을 넘어 보이는 소녀(적어도 내 기준에선 소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바람도 엄청 불고, 불도 나고, 난리도 아니에요’라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지나간다. 어느덧 그 행렬은 계속 꼬리를 물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근처 대피소로 향했다.

그 와중에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 등 내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매체에서 우리의 안부를 묻는 연락이 마구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동시에 최다 인원들과 대화를 한 것 같다. 그중에서도 산림조합에 근무하는 집사람의 오빠가 산불이라는 게 엄청 무서운 거다.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얼른 대피하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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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포 쪽의 화재. 거리상 2k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다.
경동대학교 기숙사생들이 전원 대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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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장님으로부터 가능하면 우리 주민들도 대피소로 대피하라고 하시니. 우리 집에 불나면 안 되는데, 최대한 버텨봐야하는데 하며 찜찜한 기운을 남기며 차에 몸을 실었다.


지금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점에서 주변의 화제는 어느 정도 진입되고, 바람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직 천진에 남아있던 지인이 그나마 다행인 소식들을 전해준다.


'아직 우리 동네는 괜찮은 거 같아요......'


아.......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터라, 일단은 가까우면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자, 아야진 해변으로 차를 움직였다.

차를 달리는 동안에도 수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 부부가 정성스럽게 만들고 쌓아온 모든 것이 남겨져 있는 집과 작업실의 안전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억울해서일까 울컥하며 슬프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언덕을 넘어 천진과 봉포가 어느 정도 보이는 바닷가에 다다르니, 얼마 전까지 거센 불길로 인해 빨갛게 타오르던 하늘이 많이 누그러져 있는 기분이 든다.


'아, 이제 좀 살았구나'


긴장이 풀리고, 차에서 그제야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새벽 4시가 좀 넘어서, 잠이 깼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 지나가는 차 소리에 잠이 깨버린 것이다. 그때 즈음, 바람은 거의 다 죽었고, 왠지 느낌이 집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집 앞에 도착하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모든 것이 멀쩡했다.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하늘을 덮고 있었고, 아직은 100%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같아서, 이제 집에 머무르기로 하고 침대에 잠깐 몸을 뉘었다.

누워서도 계속 인터넷 뉴스와 TV를 주시했고, 다행히 해가 떠갈 때쯤 주불이 많이 잡혀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제 진짜 좀 자야겠다.


아침 9시쯤 사람들의 분주한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대충 2-3시간 정도 잠들었던 느낌이다. 건너편 파출소에는 이미 소방대와 방송국 등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다들 피해 상황을 살피고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도 인터넷 방송을 크게 틀어두고, 집 정리를 시작했다.


처음 겪는 일인지라, 뭘 어떻게 챙겨야 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마구 챙겨간 짐들과 널브러져 있는 짐들, 아무 일도 없었지만 큰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집은 작은 전쟁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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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다음날 속초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왔는데, 산불현장의 중심을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했다. 길가에는 화재로 피해를 입으신 많은 건물들이 검게 그을린 채 그대로 남아있었고, 피해자분들은 망연자실 멍하니 타다 남은 자신의 집과 상가를 바라보고 계실 뿐이었다.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한 여러 가지 감정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국에서 오신 소방관계자분들이 모여서 식사하시는 곳을 지나치는데,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에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전국에서 오신 소방관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하루 종일 안부를 물어보신 모든 분들에게 다들 걱정 마시라고 생존신고를 한 후, 이제 겨우 마음껏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길고 긴 24시간이 겨우 끝나가는 듯하다.


우리는 정말 놀라고, 무섭고, 긴장된 밤을 보냈고,

미안하고 안도하는 하루를 보내며, 짧지만 기나긴 평생에 잊지 못할 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산불로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저희도 도움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산불 진압을 위해 힘써주신 전국의 소방관, 관계자분들과 공무원분들에게 큰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이 진짜 영웅입니다.

*밤새 저희 안부를 물어봐주신 모든 친인척, 지인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너무 많으셔서 한 분 한 분 일일이 연락 못 드리는 점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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