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도 알맞게 따뜻하고 바람도 살랑살랑한 가을날이다. 얼마 전 성당에서 주최하는 어르신 담양 가을 나들이 신청해 놓고 마음이 약간 설레었다. 남편과 자주가지 않는 여행이라서 함께 할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허구한 날 집에서 같이 보내는 시간은 많지만 여행이란 또 다른 감흥이 있다. 나이 들 수록 가장 편안 사람이 남편인 것을 뒤늦게야 알아간다.
셈하지 않아도 우리는 같이 할 시간이 짧아지는 탓일 것이다.
가을은 하루가 다른 계절의 열흘 가듯 빠르다고 말한다. 80대의 노 부부의 삶을 더 짧고 애틋함이 계절마다 묻어있다. 이번 계절을 무엇을 남기고 보낼까? 늘 혼자서 말하고 답을 하면서 보낸다. 하루 나들이지만 남편과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걷고 있는 걸음걸이도 마음에 안정감을 채워 준다. 숱하게 많은 날을 느끼며 부대끼고 살아온 탓일 것이다.
9시에 성당에서 버스 2대로 담양을 향해 출발했다. 신부님 수녀님들도 함께했다. 모두가 교우여서 분위기는 편안하다. 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고 1시간 40분쯤 걸리는 거리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들 풍경은 이제 추수가 막바지라서 거의 논들은 빈 논으로 내년을 기약하며 쉼을 가질 것이다. 빈 들녘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사람도 때때로 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잠시 드는 생각이다.
담양 죽녹원 대나무 숲은 생태적 경관적 정서적으로 보존할 큰 가치가 큰 유형무형의 자산을 말하며 죽녹원 대나무 숲이 국가 산림 문화 자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먼저 대나무 숲길로 들어서면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대나무 숲의 풍광에 놀라워 탄성을 지를 정도로 우리 시야를 압도한다.
길을 걷고 있노라면 시원한 대나무 숲 향기에 매료되며 얼마나 되었을지도 모르는 대나무 크기에 놀란다. 대나무 숲길은 8가지 길 이름을 붙여놓고 산책하는 재미를 준다. 운수 대통길, 사색의 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죽마 고우의 길, 추억의 샛길, 성인사 오름 길, 철학자의 길, 선비의 길 이렇게 8가지 길 이름을 명명해 놓고 산책하는 재미를 느끼도록 해 놓았다.
대나무 길을 말없이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호하는지 대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그분들의 수고가 느껴진다. 살면서 아무리 바빠도 익숙한 풍경에서 벗어나 나를 다독이며 마음을 쉬는 시간들도 필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가 정확하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가끔이면 흔들리고 아프고 힘들고 그러면서 살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자꾸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 아니면 오늘처럼 조용한 침묵 속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좋을 것 같다.
길을 걷다가 간간히 운치 있는 한옥도 풍경을 더 해주어 좋았다. 한옥 마루에 걸터앉아 쉬면서 사진도 찍고 한옥 카페 누마루에 앉아 차 마시며 누리는 여유가 한가롭다. 아직은 곁에 남편이 계셔 같이 누릴 수 있어 내게 주는 축복인 것 같다. 길 양옆 단풍도 가을을 알려주고 있다. 낙엽도 지고 단풍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을은 가을이구나 싶어 진다.
모처럼 남편과 함께 나온 가을 여행이 즐겁다. 여행은 보는 것만이 아닌 먹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담양은 떡갈비와 숯불갈비가 유명한 고장이다. 식당은 아주 큰 식당에서 맛있는 숯불갈비를 먹고 남편은 막걸리도 한잔 하시고 너무 좋아하신다. 그래, 살아가는 기쁨이 별것인가, 이처럼 좋은 사람과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맛있는 것 먹을 때 느끼는 행복도 크다.
그 모습이 보기 좋다. 밥 먹고 너른 잔디에 가 있는 공간에서 차도 마시고 쉬고 있는데 가을의 가장 맛있는 단감을 도로에 차를 대고 감을 팔고 있었다. 남편은 원래 무엇을 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웬일인지 남편은 감 살까? 하시며 감을 무려 세 봉지 수녀님 것, 반장님 것, 우리 것까지 세 봉지를 사신다. 웬일이야? 나는 놀라서 물었다. 남편은 원래 작은 돈보다 큰돈을 잘 쓰시는 분이다.
우리는 메타세쿼이아길을 걷기 위해 이동했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길이다. 2002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숲 대상을 받은 길이다. 메타세쿼이아길은 거대한 가로수가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경에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탐방객이 끊이지 않는 담양의 명소이기도 하다. 도로의 한쪽에 흙과 모래를 깔아 맨발로 걷는 길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요즈음은 건강에 좋아 맨발 걷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아직은 단풍이 들지 않아 가을의 정취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길을 연인끼리 친구끼리 담소를 하며 걷는 모습들이 좋다. 영화, 드라마, 광고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메타세쿼이아 길은 파릇한 새잎이 나오는 새봄이나 붉은 물결을 볼 수 있는 가을 풍경은 황홀경이라 하지만 우리가 간 날은 그와는 다른 풍경이었지만 나름 한적하고 좋았다.
어르신들이라서 해가 지기 전 빨리 성당에 도착을 하고 하루 여행을 맞추었다. 버스 안 우리 부부 의자 건너에 앉아 계시던 수녀님은 감을 드리니 너무 반가워하신다. "어머! 저 감 킬러인데 어떻게 아셨나요?" 그러시며 어린애처럼 좋아하신다. 버스에서 내릴 시간이 되니 감을 꼭 안고 "기도 해 드릴게요." 말하시는 모습이 순진한 소녀 같이 보기 좋다. 세상에 저리 작은 걸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더 행복하고 선물 받는 느낌이다.
오늘 담양에서 남편과 가을을 한 아름 가슴에 가득 담고 돌아왔다. 이만 하면 노부부의 삶은 넉넉하고 감사하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나 생각해 본다. 물질뿐이 아닌 마음을 주는 것도 선한 영향럭이다.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우리가 가져야 할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