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정은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서 생각한다. 그래야 살짝 긴장을 하고 부지런을 낸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늘어지기 때문이다. 일정이 촘촘한 하루를 살아 내고 밤이 오면 '오늘을 잘 살아냈구나' 하고 안심을 한다. 남편 점심을 챙겨야 할 일이 없는 날이다.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내장사 단풍놀이를 가셨다. 어쩌다 혼자가 되는 날도 괜찮다.
어느 시인은 때때로 혼자서 고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요를 습득하면 두려움도 살아진다고.
11시쯤 시니어 사무실에 도착해서 교육을 받고 직원 중 한 분에게 책 한 권을 사인해서 건넸다. 늘 걸렸던 분에게 책을 주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 점심을 먹은 후 천천히 걷는다. 예전에는 사람 발길이 끊어지지 않은 원도심이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곳으로 도심의 중심이 옮겨 가고 원 도심은 사람이 없다. 나는 옛 추억을 소환하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는다.
차만 타고 다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을 걸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많다. 예전 내 발길이 수없이 머문 곳도.
스포츠 옷 매장에 들러 등산 바지도 하나사고 혼자 다니니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너무 편하고 좋다. 곁에 사람이 있으면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다. 대화를 해야 하는 일도 신경을 써야 하고 하여간 상대가 있으면 상대의 마음도 살피며 걸어야 한다. 이건 무슨 일인지 나이 들어가면서 말이 하기 싫어진다. 필요 없는 말을 쏟아내고 나면 마음이 헛헛해오기 때문이다.
한참을 걸어 우체국 앞으로 왔다. 낮 시간인데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우체국 주변에는 관광객을 위해 우체통 거리라고 예쁘게 꾸며 놓았다. 벤치도 놓여 있어 쉬어가라는 의미 일 것이다. 나는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제법 불어 머리카락이 날리고 스카프까지 날린다.
젊어서는 못해 본 일인데 나이 드니 참 부끄럼이 없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가을 탓일까? 갑자기 좋아하는 시인님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는다. 그래, 이런 때는 내 마음 안에 흔적만 남긴다.
우체국 옆길 거리는 한적하다. 벤치에 앉아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길 건너 이층에는 레스토랑이 있어 예전에는 자주 다녔는데 이제는 다른 상호의 가계가 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만나고 살았을까, 그렇지만 그때 만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생각에 잠겨있는데 차가 한대 멈추고 어느 여성분이 일층 가계 안으로 들어간다.
'음식 연구소' 주인 이름을 보니 나랑 다도를 같이 했고 내게 자수 수업을 받았던 분이다. 반가움에 아는 체를 할까 하면서 잠시 갈등을 했다. 그러나 순간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는 체를 한들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 내 마음의 고요를 깨트리는 일일 것만 같아 생각을 멈춘다.
그냥 앉아 바람하고 노는 게 훨씬 좋다. 머리가 흩날려 자꾸 눈을 덮으려 해서 귀찮다. 속으로 핀이라도 꼽고 나올 것 그랬나 하고 혼잣말을 한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낭만 가객이 된다. 누구에게 편지 부치는 일도 드문 지금 나는 우체국 앞에 앉아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 진다. 가을이란 날씨는 묘하게 사람이 그립다.
갑자기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노래를 듣고 싶어 유티브를 켜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