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가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시간, 빗소리가 주룩주룩 내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깼다. 그냥 소리 없이 오는 비가 아니다. 아파트 10층에 살고 있지만 억세게 쏟아지는 빗소리는 땅바닥에 떨어지는 마찰음까지 느낄 정도로 세차다. 지난밤 잠들기 전 베란다 창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내리는 소낙비 소리가 더 확실하게 들린다.
어~~ 비가 오는구나. 빗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는데 온 몸에 기운이 없다. 아니 삭신이 아픈 듯 기분이 좋지 않다. 일어나야 하는데 눈이 잘 뜨이질 않는다. 안방에서 문을 열고 자는 남편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일어나기가 싫어 남편을 부른다. 세상에 가장 만만한 사람이 남편이다. 누가 내 말을 그리 잘 들어주겠는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이불을 머리까지 쓴다. 그 순간, 한 공간에 사람이 같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그 생각에 나는 마음이 놓인다. 같이 살고 있는 동거인 남편에게 때론 마음 상했던 일도 다 도망가고 감사한 마음만 남는다. 남편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은 이미 얼리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화장실 갈 겸 눈을 뜨고 일어나 거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었다. 밖은 비가 오고 캄캄해서 나는 밤중으로 착각을 했다. 비는 어쩌자고 날도 새지 않은 캄캄한 밤에 이리 많이 내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누구 한 많고 설음이 가시지 않아 그 서러움을 눈물로 토해 내고 있을까. 빗소리는 주룩주룩 내리고 그치질 않는다.
사람은 모두가 알지 못하는 저마다 설음을 안고 산다. 옛말에 "네 설음 내 설음 말하지 말고 내 설음 드러나 보시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다른 사람 설음보다는 내 설음이 크다는 말이다. 어쩌면 설음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안고 살아야 하는 자기만의 삶의 무게인 것이다. 설음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생각에 꼬리를 물고 비몽 사몽하다가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언제나 여늬 날처럼 남편은 아침이 되어도 나를 깨우지 않는다. 어느 날 내가 선언을 한 이후부터다. " 내가 일어날 때까지 나를 깨우지 마세요." 나는 아침잠이 많다. 지금은 출근해야 하는 일도 없는데 새벽에 일어나 바쁘게 종종 대며 서두르며 사는 건 싫다. 아이 들 키울 때, 남편 출근할 때 많은 날 그렇게 시간에 쫓겼던 날들에서 벗어나 이제는 여유롭게 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니 하늘은 어둑하고 여전히 비는 오고 있다. 주룩주룩 이 아닌 작은 빗줄기다. 비 오는 날은 마음이 착 가라앉고 차 분해 진다. 참 편안하다. 아침을 먹고 남편과 나는 각자의 공간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남편에게 보이차 한잔을 청해 마신다. 오래전부터 거기 놓여 있는 의자만큼 편안한 남편과 마시는 차 맛이 고뇌처럼 향기롭다. 삶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