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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 파트너 이석재 Sep 02. 2020

삶이 내게 말하려는 것

나가는 글

  집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는 날이다. 어느덧 8 차이다. 치료 일정을 처음 안내받을  걱정이 태산 같았다. 과연 나는  이겨낼  있을까? 방사선 치료에 대해 사전 공부를 인터넷으로 했지만, 실제 어떻게 진행될지 호기심과 걱정, 불안이 교차하며 마음이 불편했다. 짝이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앉아 파란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유럽 여행할 때나 보던 아름다운 모습이다. 코로나 19 오기 전에는 연일 계속되는 미세먼지로 하늘이 노랬다. 그래서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있으면, '유럽 하늘'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코로나 19 인해 가을이 온통 유럽 하늘이다.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쉰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낄  있다. 아침의 햇살이 따스하다. 서울의 가을 아침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


치료실에서 느끼는 평온함


  공간 감성을 실천하기 위해 매번 30분에서 1시간 이내에 병원에 도착한다. 병원 앞 정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미꽃들이 있다. 어제는 꽃 몽우리였지만 아침에 보면 만개한 경우가 있다.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가장 싱그러운 꽃을 찾아 사진에 담는다. 그중에 하나는 운전하느라 수고한 짝에게 카톡으로 선물한다. "고마워."라고 짧은 문자도 있지 않고 함께 보낸다. 이러한 활동이 병원에 도착하면 하는 루틴이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목이 약해졌다. 물이나 음식을 삼킬 때 목에 통증을 느낀다. 그 전에는 커피 한잔을 들고 산책도 했다. 당분간 커피를 마시기는 어렵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이 가까워진다. 치료실로 내려가 사전 준비를 했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호명한다. 늘 경쾌한 목소리로 불어준다. 이 작은 소통도 환자에게는 긍정 에너지를 준다. 5회 차 진료까지는 힘든 줄을 몰랐는데, 그 이후부터는 치료를 받고 나면 몸이 파김치가 된 듯 쳐진다. 오늘은 치료받는 과정에서 짧은 호흡 명상을 했다. '하나'하며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둘'하며 두 배 느리게 내쉬었다. '둘'하며 들이쉬고 '셋'하며 내쉬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긴장이 풀리미면서 몸이 가져워졌다. 숨을 내쉬는 동안 방사선을 노출하는 기계가 뚜두둑 소리를 내면서 왼편에서 오른편까지 돌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모두 아홉 차례를 반복했다. 오늘은 그 둔탁한 소리마저 부드럽게 들렸다.


  삶은 날마다 새롭다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온다. 순간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는 중에 웃음이 나오다니 생각해도 신기했다.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던 첫날, 이 치료실에서 처음 느꼈던 막연한 긴장과 불안한 마음 등이 모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제 평온함에 졸음을 느낄 정도이다. 문득 마음이 떠돌며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오늘 이 삶이 내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삶은 날마다 새롭다. 시선을 밖으로 돌렸을 때 경험되는 삶은 동일하다. 그러나 밖을 향했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자기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동일한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다. 새로움을 찾을 수도 있다. 치료실의 환경은 동일하지만,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치료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더 나아지는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환부에 있는 암을 소멸시키는 것보다, 내 삶이 이전처럼 건강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긴장과 불안, 걱정이 편안함, 희망과 확신으로 바뀐다. 이와 같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삶은 날마다 새로워진다.


삶은 구성하는 것이다

 

 오늘 이 삶이 내게 말해주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삶을 그냥 살아가다 보면, 그 삶은 사라진다. 그러나 삶을 구성하고 추구하다 보면, 그 삶을 주도한다. 내 평생 처음 겪어보는 암 환자로서의 삶이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 앞에 펼쳐진 사건에 눈길을 주고 주의를 집중한 결과이다. 이제 한발 뒤로 물어나,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다. 사건에 휘둘리지 않고, 사건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혹시 암이 전이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엄습해 왔을 때, 이성적으로는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았으나 감성은 휘둘렸다. 긴장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지금은 '사건에 대한 생각은 또 다른 생각에 불과하다'라고 인식한다. 생각에 묶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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