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내려앉는 속도로 걷다 보면

남산 둘레길에서 마주친 뜻밖의 대답들

by 참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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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소란이 발아래로 낮게 깔리는 시간, 나는 습관처럼 남산 둘레길로 향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격렬함보다는, 내 안의 소음을 잠재우기 위한 일정한 보폭이 필요한 날들이 있다. 흙과 아스팔트가 적절히 섞인 길을 타박타박 걷다 보면, 복잡하게 얽혀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던 생각의 타래가 느슨해지는 순간이 온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시간의 밀도를 바꾸는 일임을 이곳에 올 때마다 실감한다. 어깨를 짓누르던 일상의 무게는 중력을 거스르는 남산의 완만한 경사 앞에서 조금씩 가벼워지고, 건조했던 마음에 비로소 눅진한 바람이 스며든다.


해 질 녘 남산은 도시가 가장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기 직전의, 기묘한 적막과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하얏트 호텔 유리벽에 반사되는 노을이다. 서쪽 하늘을 붉게 태우며 사라져 가는 태양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 거대한 유리 건물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횃불 같기도 하고, 도시를 항해하는 배의 등대 같기도 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압도한다. 그 강렬한 빛의 산란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내가 쥐고 있던 고민들이 태양 앞의 촛불처럼 얼마나 사소하고 위태로운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그 풍경 앞에서는, 억울했던 감정도, 조급했던 마음도 잠시 그 빛에 녹아내려 투명해진다.


길을 따라 조금 더 시선을 돌리면, 멀리 보이는 성당의 실루엣이 마음에 묵직한 닻을 내린다. 뾰족하게 솟은 첨탑과 그 위를 감싸는 저녁의 푸르스름한 공기는 장엄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인간이 쌓아 올린 저 고요한 건축물은 수많은 사람의 기도와 염원이 깃들어 있기에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붉은 노을과 대비되는 성당의 차분한 자태를 바라보며 나는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달리고 있는가. 웅장한 침묵으로 답하는 저 풍경 앞에서, 머릿속을 맴돌던 소란스러운 질문들은 스스로 꼬리를 감추고, 그 빈자리에 예상치 못한 평온이 깃든다.


결국, 걷다 보면 보이고, 걷다 보면 만나는 것들은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나 자신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답들이, 땀이 식어가는 등줄기와 규칙적인 발소리 사이에서 불쑥 고개를 든다. 그것은 논리 정연한 문장이 아니라, '괜찮다'는 감각, 혹은 '다시 해볼 수 있겠다'는 덤덤한 용기에 가깝다. 노을이 완전히 넘어가고 도시에 하나둘 불이 켜질 때쯤이면, 나는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찾던 답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걷는 동안 비워낸 마음의 틈새로 조용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음을. 오늘따라 유난히 빛나던 하얏트의 창문과 성당의 그림자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멈추지 않고 걷는 한 우리는 언제나 답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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