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우리를 데우는 말 한마디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by 참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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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번화한 거리를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소란스러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붉은 벽돌의 건물이 구름을 이고 서 있습니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회색빛 구름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첨탑의 십자가 끝에 걸려 있고, 세월의 때가 묻은 시계탑은 무심한 듯 정직하게 오늘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비탈을 올라 명동성당 마당에 서게 되는 것은 단순히 웅장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보기 위함만은 아닐 것입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묘하게 마음 한구석을 덥혀오는,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이 이곳에는 늘 고여 있기 때문입니다.


시선이 첨탑 끝 십자가에 닿는 순간, 자연스레 2009년 2월의 기억이 흑백영화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겨 명동 일대를 가득 메웠던 그 겨울, 우리는 시대의 큰 어른을 떠나보내며 종교를 넘어선 깊은 상실감을 공유했습니다. 평생을 가장 낮은 곳, 가장 어둡고 소외된 이들의 곁을 지키며 스스로 '바보'라 칭했던 김수환 추기경님. 권력 앞에서는 서릿발처럼 엄격했으나 가난한 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따뜻했던 그분의 삶은, 마치 저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처럼 단단하고도 온기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나시며 남긴 유언은 그분의 생애만큼이나 간결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거창한 철학적 수사나 난해한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도 알 법한 이토록 평범한 두 마디가, 왜 그토록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사무치게 했던 걸까요. 아마도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와 미움 속에서, 삶의 본질인 '사랑'과 '감사'를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단순한 그 말이 사실은 우리가 평생을 걸쳐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임을, 그분은 마지막 숨결을 통해 일깨워주고 가셨습니다.


여전히 찬 바람이 부는 날에도 명동성당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우리는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차가워도, "서로 사랑하라"던 그 따스한 유언이 아직 우리 곁에 유효함을, 그리고 저 십자가 아래서만큼은 잠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서로의 온기를 나눠도 괜찮음을 말입니다. 올려다본 성당의 첨탑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높고 굳건해 보입니다. 그분이 남기고 간 사랑이라는 유산이 이 언덕을 든든히 지탱하고 있는 한, 우리의 겨울은 결코 춥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추운 겨울에도 모여있는 명동상권이 다시 살아나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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