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영어와의 밀당
Stress vs. Fun
내 남편은 50대 중반으로 원자력 발전소 엔지니어이다. 몇 년 전에는 아랍에미리트(UAE)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냥 그 자리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낯선 중동 사람들과 영어로 중요한 회의를 해야만 했던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 준다. 공고와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남편은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닐 수 있었던 대학원 준비를 하였으나, 영어 시험에서 불합격되어 지금의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회사에서의 업무 시, 주로 영어 문서를 읽고 써야 하기에 영어 독해와 쓰기 실력은 좋지만, 영어 듣기와 말하기가 늘 스트레스다. 미국 현지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고, 해외 출장을 여러 번 다녀온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의 주범은 늘 영어다.
그렇다고 영어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 언제 어디에서 영어를 만나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영어 성경과 신문 기사를 읽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전화 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 한다. 그러면서도 영어만 아니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한다면서 영어를 원망하곤 한다. 요즈음은 엄마 태중에서부터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태어나는 듯하다. 동요에서 시작된 영어는 초중고 12년의 시기를 거쳐 대학교 4년, 그 이후의 대학원 진학과 취업에서도 그리고 취업 이후 퇴직할 때까지 영어는 우리를 오페라의 유령처럼 따라다닌다. 심지어 나이가 지긋한 석박사들도 학회에서 절절대면서 영어로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다른 면에서는 당당한 한국인이 왜 영어 앞에 서면 이리도 작아지고 힘들어지는 것일까? 어른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영어를 배우러 온 학생에게 처음 하는 질문은 “영어가 어때? 재미있어?”라는 질문이다. “How are you?” 가 아닌 “How is English?”로서 학생과 영어와의 관계를 묻는다. 70% 이상은 싫어요. 20%는 그저 그래요. 10%는 좋아요! 정도의 대답을 듣게 된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영어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내 역할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인해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힘들어하는 아이들이다. ADHD나 틱 증상이 있는 학생, 단어시험만 보면 우는 학생, 자폐증이 있는 아이, 영어 유치원에서 배운 단어를 의미도 모른 채 내뱉는 학생, 실력이 낮아 친구들과 학원을 같이 다닐 수 없는 학생 등 그동안 다양한 아이들을 만났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인생에서 넘어야 할 큰 산 중에 하나가 영어인 듯하다.
사랑은 여러 인간관계 중에서 양가감정(ambivalence)을 일으켜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 양가감정은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가 조현병의 핵심 증상 중 하나로 언급하였는데, 같은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나 생각을 동시에 가지는 상태이다. <자존감 수업>에서 윤홍균 저자는 사랑의 양가적인 속성을 ‘밀당’이라고 표현한다. 좋으면서도 밉고, 가까이 두고 싶지만 두려워 멀고, 사랑하지만 증오나 원망도 하게 되는 것인데, 한 대상에 대하여 이러한 극단의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오이겐 블로일러가 말한 자기 불일치 이론(self-discrepancy theory)은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심리학적 이론이다. 실제 자신의 모습인 실제 자기상(actual self-image)과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인 이상적 자기상(ideal self-image)의 불일치를 말한다. 차츰 그 의미가 넓어져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정상적인 심리상태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감정과 생각은 자신이나 연인 혹은 부모 형제 자식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영어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영어 앞에서만 서면 진땀 나지만, 영어 원어민처럼 능숙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자신의 영어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하거나, 실수하지 않고 완벽한 영어를 말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자기상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영어를 마스터하고자 하는 비현실적인 이상이나, 내신 100점, 영어 인증점수 만점과 같은 완벽주의자 적인 목표를 갖는 것도 문제가 된다. 또한, 영어로 능숙하게 의사소통하길 원하지만, 일상에서 전혀 노력을 하고 있지 않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배워서 부작용이 생기는 등, 이상과 현실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 스트레스와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딸에게 어떤 남자가 좋은지를 물었더니 재미있는 남자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대학 입학을 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그런 남자를 사귀었다. 나도 영어가 재미있어서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내게 쓴 약을 먹이기 위해 꿀을 묻히시곤 하였다. 사실, 민감한 내 혀끝에 쓴맛이 살짝 느껴지긴 했지만, 엄마의 사랑하는 마음과 내 몸에 좋을 거라는 생각에 꿀꺽 삼키곤 했다. 내 영어학원 모토는 Jung’s English Time is Fun!(정스 영어시간은 재미있어!)이었다. 학생들이 영어의 달콤한 맛과 재미를 느끼길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어를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학생들이 영어의 달콤한 맛을 먼저 느끼도록 영어에 꿀을 듬뿍 발라 먹이곤 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영어의 달콤한 맛을 자주 맛보아야 영어의 시고 맵고 떫은 다른 맛도 즐길 수 있는 건강한 입맛을 갖게 될 것이다. 바로 슈거 코팅(sugarcoating 설탕 발림)을 해서라도 먹이고 싶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