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를 넓히면 열리는 가능성
10년 조금 안되는 바리스타 생활이었다. 서른 조금 넘어 그만둔 직업이니 인생의 1/3을 커피에 부은 거다.
내가 원두에 노동만 갈아 넣었나? 아니, 아니다. 한 가게에서 오래 근무하면 배울 수 있는 점에 한계가 있기에 여기저기 세미나니 교육이니 수강하러도 많이도 다녔더랬다. 커리큘럼당 몇백하는 금액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돈도, 시간도, 내 손목도 커피에 함께 녹아있었다.
20대 초반에는 커피 한다고 이야기 하는 게 어쩐지 머쓱했다. 커피 강사를 하던 시절, 명문대를 졸업한 무례한 내 친구는 "언제까지 시간강사 할 거야, 너도 직장 가져야지." 소리가,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으려면 "알바 언제 끝나?" 소리가 지겨웠다. 친구들 연봉협상 이야기에 내게는 '시급'이 올랐는지 물었다. 바리스타도 직업이고, 시급 계산이 아닌 연봉협상을 한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시선이 달라질 리 만무했다. (물론 극소수의 몇몇이었다.)
그 시절 내 속에서 피어오르던 건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자격지심이었나 보다. 열등감은 매번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내가 대회를 나가야지, 인스타에 내 라떼아트를 올려야지, 내 실력이 쌓이면 그들도 무례하지 않겠지. 그때부터 몇천만 원의 교육비와 라떼아트 연습용 우유비로 재산을 탕진했다. 자연스레 그런 부류들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물 온도, 원두 그람 수 소수점에 열을 올리던 커피 변태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퍽 연구자가 된 듯했다.
그렇게 내 시야는 점점 좁고 깊어졌다. 나를 가르치던 스승(대표님)은 "시야를 넓혀라" 무던히 이야기했고, 나는 시야를 '언어'로 넓히고 싶었다. 국내 서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1차원적인 나는 시야를 넓힌다는 말이 곧 세계로 뻗어나간다는 말처럼 들렸으니. 실천만 할 수 있었다면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나의 포부를 당차게 알렸을 때 돌아오는 말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다른 잘할 수 있는걸 찾으란 이야기였어." 라니. 아무리 그가 대표였다지만, 그의 앞에서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그의 뜻은 나이가 먹고 언제까지 바에 있을 수 없으니, 너가 잘하는 걸 찾아 조금 더 전문적으로 배우라는 이야기였단다. 오타쿠마냥 하나만 파지 말고, 환기 좀 시키라며 전공을 살려보는 건 어떨지 내 전공을 묻는데, 나는 공대생 출신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작은 뇌로는 감당이 안 되는 문제였다. 어쩌면 커피만 하기에도 벅찬 스케줄에 귀를 닫은 고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일이 안풀리면 배배 꼬이기 마련이다. 그 무렵 나는 배배 꼬여있었다. 가게 오픈에 대한 가족들의 반대가 가장 큰 산이었고, 대회를 나가기에 나는 지독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어 큰 대회는 엄두조차 나지 않아 잘돼가던 친구들을 바라만 보고 열등감을 원동력으로 삼았을 때였다. '언제까지 바에 있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난 이거 하나만 바라봤는데, 가게도 오픈하지말고 다른 걸 배우라구요?
가족들의 반대와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오로지 금전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커피와 생이별 후 현 직장에서 결혼할 남자를 만나 결혼 준비 를하며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신혼집 인테리어 실측 차 방문한 디자이너가 주방을 보더니 대뜸, "바리스타세요? 저도 커피 했어요! 이렇게 브루잉으로 내려주는 집은 처음에요." 연신 반가워하던 그는 내게 언젠가 다시 본인 가게를 할 거라며 눈을 반짝였다. 몇 년이 흘러 인테리어 실측 차 방문한 디자이너의 인사말에서 알아챘으니, 아무래도 시야를 넓히라는 잔소리를 하루에 몇 번씩 하던 대표의 답답함도 큰 산이었겠다 이제서야 짐작한다.
그건 분명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른 일과 병행해야 바리스타로서의 쥐꼬리 연봉을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언제까지 바에 있을 수 없다는 말도, 너만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모두 나를 위한 말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인테리어를 배워 본인의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인테리어 경력은 그가 가게를 오픈할 때 큰 자양분이 되어줄 테다. 그의 가게가 프랜차이즈로 확장된다면 더욱이 빛을 발할 수 있다.
하나만 잘하기도 벅찬데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던 N 년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꼬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을 줄 아는 것도 건강한 마인드라고. 그때의 넌 환기가 필요했던 거고,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수두룩 빽빽한 세상에서 너의 아이덴티티를 찾는 건 퍼스널 브랜딩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