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유미 Jan 10. 2024

하나만 잘하기도 벅찬데

시야를 넓히면 열리는 가능성

 10년 조금 안되는 바리스타 생활이었다. 서른 조금 넘어 그만둔 직업이니 인생의 1/3을 커피에 부은 거다. 

내가 원두에 노동만 갈아 넣었나? 아니, 아니다. 한 가게에서 오래 근무하면 배울 수 있는 점에 한계가 있기에 여기저기 세미나니 교육이니 수강하러도 많이도 다녔더랬다. 커리큘럼당 몇백하는 금액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돈도, 시간도, 내 손목도 커피에 함께 녹아있었다. 


 20대 초반에는 커피 한다고 이야기 하는 게 어쩐지 머쓱했다. 커피 강사를 하던 시절, 명문대를 졸업한 무례한 내 친구는 "언제까지 시간강사 할 거야, 너도 직장 가져야지." 소리가,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으려면 "알바 언제 끝나?" 소리가 지겨웠다. 친구들 연봉협상 이야기에 내게는 '시급'이 올랐는지 물었다. 바리스타도 직업이고, 시급 계산이 아닌 연봉협상을 한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시선이 달라질 리 만무했다. (물론 극소수의 몇몇이었다.)


 그 시절 내 속에서 피어오르던 건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자격지심이었나 보다. 열등감은 매번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내가 대회를 나가야지, 인스타에 내 라떼아트를 올려야지, 내 실력이 쌓이면 그들도 무례하지 않겠지. 그때부터 몇천만 원의 교육비와 라떼아트 연습용 우유비로 재산을 탕진했다. 자연스레 그런 부류들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물 온도, 원두 그람 수 소수점에 열을 올리던 커피 변태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퍽 연구자가 된 듯했다.


 그렇게 내 시야는 점점 좁고 깊어졌다. 나를 가르치던 스승(대표님)은 "시야를 넓혀라" 무던히 이야기했고, 나는 시야를 '언어'로 넓히고 싶었다. 국내 서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1차원적인 나는 시야를 넓힌다는 말이 곧 세계로 뻗어나간다는 말처럼 들렸으니. 실천만 할 수 있었다면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나의 포부를 당차게 알렸을 때 돌아오는 말은,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다른 잘할 수 있는걸 찾으란 이야기였어." 라니. 아무리 그가 대표였다지만, 그의 앞에서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그의 뜻은 나이가 먹고 언제까지 바에 있을 수 없으니, 너가 잘하는 걸 찾아 조금 더 전문적으로 배우라는 이야기였단다. 오타쿠마냥 하나만 파지 말고, 환기 좀 시키라며 전공을 살려보는 건 어떨지 내 전공을 묻는데, 나는 공대생 출신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작은 뇌로는 감당이 안 되는 문제였다. 어쩌면 커피만 하기에도 벅찬 스케줄에 귀를 닫은 고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일이 안풀리면 배배 꼬이기 마련이다. 그 무렵 나는 배배 꼬여있었다. 가게 오픈에 대한 가족들의 반대가 가장 큰 산이었고, 대회를 나가기에 나는 지독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어 큰 대회는 엄두조차 나지 않아 잘돼가던 친구들을 바라만 보고 열등감을 원동력으로 삼았을 때였다. '언제까지 바에 있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난 이거 하나만 바라봤는데, 가게도 오픈하지말고 다른 걸 배우라구요?

 

 가족들의 반대와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오로지 금전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커피와 생이별 후 현 직장에서 결혼할 남자를 만나 결혼 준비 를하며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신혼집 인테리어 실측 차 방문한 디자이너가 주방을 보더니 대뜸, "바리스타세요? 저도 커피 했어요! 이렇게 브루잉으로 내려주는 집은 처음에요." 연신 반가워하던 그는 내게 언젠가 다시 본인 가게를 할 거라며 눈을 반짝였다. 몇 년이 흘러 인테리어 실측 차 방문한 디자이너의 인사말에서 알아챘으니, 아무래도 시야를 넓히라는 잔소리를 하루에 몇 번씩 하던 대표의 답답함도 큰 산이었겠다 이제서야 짐작한다. 


 그건 분명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른 일과 병행해야 바리스타로서의 쥐꼬리 연봉을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언제까지 바에 있을 수 없다는 말도, 너만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모두 나를 위한 말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인테리어를 배워 본인의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인테리어 경력은 그가 가게를 오픈할 때 큰 자양분이 되어줄 테다. 그의 가게가 프랜차이즈로 확장된다면 더욱이 빛을 발할 수 있다. 


 하나만 잘하기도 벅찬데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던 N 년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꼬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을 줄 아는 것도 건강한 마인드라고. 그때의 넌 환기가 필요했던 거고,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수두룩 빽빽한 세상에서 너의 아이덴티티를 찾는 건 퍼스널 브랜딩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