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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Aug 16. 2019

소주잔이 데리고 온 그 사람

내가 당신을 위해 해야 하는 일.

 요 근래 어떤 한 사람의 생각으로 내 머릿속은 가득 차있다. 글을 쓸 때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할 때 빼고, 그 사이사이의 순간은 한 사람 생각으로 메꿔진다. 일부러 떠올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냥 계속해서 떠올랐다. 어떤 순간은 사소한 사물이, 어떤 순간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어떤 순간은 내리는 비가 자꾸만 한 사람을 불러왔다. 어젯밤 홀로 산책을 하던 중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렸다. 내리는 비가 또 그 사람을 함께 불러왔다.






 비 오는 어느 날, 그와 함께 어느 골목에 위치해 있는 작은 횟집에 갔을 때다. 주문을 마치고 음식을 기다리며 그와 헤어진 다른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어떻게 (이별을 한 남자) 그 사람은 멀쩡하게 잘 살아가지? 아주 만약에 이별을 했다면 난 그냥 사소한 거 하나만 봐도 네가 떠오를 것 같은데.."라고 하며 우리 식탁 위에 놓여있던 소주잔을 가리켰다. 

"이 소주잔, 이 소주잔만 봐도 네가 생각 날 것 같아. 그냥 뭘 보든 다 네가 생각날 것 같은데.. 그래서 너무 힘들 것 같은데.."라고 그는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일종의 '뿌듯함'부터 느껴졌다.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해주는구나..' 이런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이라고.



 이 순간이, 이 장면이 그 사람 기억에는 어떻게 저장되어 있을까. 저장은 되어있을까. 그날 했던 사소한 말다툼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같은 곳에서 같은 기억을 만든다 해도 훗날 그와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다르다. 우리의 지문이 단 한 명도 같지 않게 태어나듯 우리의 마음속 모양도 다 다르다. 그래서 같은 시간을 보낸다 해도 지나간 그 시간을 가공하고, 가공된 그 기억을 어떻게 보존하는지 그 방법도, 모양도 모두 다르다.






 그 사람과 공유했던 수많은 나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떠올리려고 마음먹으면 좋지 않았던 기억도 분명 꺼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레 떠오르는 기억들은 좋았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라면 길을 걷다가도,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많이 웃었었다. 그 사람이 떠나가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알게 된 것 하나는 그 사람이 떠나가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가 아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그걸 알게 되었다.


 소주잔만 봐도 나를 떠올릴 것 같다고 한 그 사람은 지금도 소주잔을 볼 때마다 날 한 번쯤 생각해줄까. 아니 나란 기억이 스스로 그 사람을 찾아갈까. 아마도 그 말을 한 당사자보다 그 말을 들은 내가 그를 더 자주 떠올렸고, 더 오래 떠올릴 것 같다. 그냥 소주잔만 봐도, 비 오는 날 검은색 큰 우산만 봐도, 어두컴컴한 좁은 골목길만 보여도 그 날의 그 사람이 떠오른다. 그날의 우리가 떠오른다. 떠올려진 기억은 한참 동안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다가 이제 그만 다시 가라앉아달라고 부탁의 부탁을 듣고서야 사라진다. 잠시 동안만.






 참지 못 할 정도의 아픈 기억이 아니라 다행이다. 참을 수 있을 만큼의 후회라 다행이다. 조금 버거워도 참아 낼 수 있을 것 같은 미련이라 다행이다. 지금 나는 참고 있다. 그리고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몇 번씩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 사람의 기억에 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나는 안다.

후회는 언제나 늦다는 것. 늦기에 후회이고, 되돌릴 수 없기에 후회라는 것.



 지금 내가 그 사람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결국은 참고 견뎌 내는 일. 다시는 함께 마주 보며 소주 한 잔 나누지 못하겠지만 기억 속 그 사람과 소주 한잔을 하며, 그 소주잔을 바라보며 그 사람을 기억해주는 일. 그때 받았던 그 사람의 진심을 늦게라도 고마워하는 일.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후회하는 일. 








멀리 떠나갔던 나를 기억해줬던 그 사람을 위해 이제는 내가 오랫동안 그 사람을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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