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계절이었으면 좋겠다.
여름이 가고 있다.
그렇게 더워 죽을 것 같다고, 잠자기도 힘들다고 징징거린 게 불과 며칠 전이였다. 그런 나를 민망하게 만들 정도로 요 며칠사이 더위가 한껏 풀이 죽었다.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뜨겁지만 더위의 절정을 달렸을 때처럼 습도와 온도는 높지 않다. 다행히도 여름의 더위와 함께 최고조로 치닫던 내 불면증도 한풀 꺾였다. (물론 자주 깨긴 하지만.) 오늘 새벽에는 서늘해진 바람에 얇은 이불을 찾았다. 정말 이제 여름이 가고 있나 보다.
우리나라의 계절 변화를 느낀 지 어느덧 30년이 넘어간다. 물론 어렸을 때 기억은 없지만 중고등학교 때는 하복에서 춘추복으로 바뀌면서 '아 이제 가을이네..'라고 느꼈다. 그땐 콧속으로 느껴지는 공기의 냄새, 피부에 닿는 공기의 감촉 이런 것들의 변화를 잘 몰랐다. 그 후 20대에 들어서면서 한 번의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가 참 좋았다.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그때를 가장 좋아하는 나는 그 공기를 사랑했다.
다들 '여름밤'이라고 하면 뭔가 설레는 기분이 들듯, 나한테는 초가을 즈음 그때 공기가 그런 감정을 일으킨다. 당장 옆에서 함께 손잡고 걸어갈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공기를 안주 삼아 가볍게 나와 맥주 한 잔 마셔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바람이 불어와 내 피부에 시도 때도 없이 잠시 앉았다 떠나갈 때마다 괜스레 밤하늘을 올려보고 한참 동안 잘 보이지 않는 별을 찾아본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혼잣말을 한다.
"후.. 아 진짜 좋다.."
이제 슬슬 나를 설레게 만드는 그 바람이 불어오는 그때가 다가오고 있다. 과연 이번에도 늦여름과 초가을 그 사이에 불어오는 그 바람을 맞고도 '좋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번만큼은 그 바람이 나를 상쾌하게 만들지는 못 할 것 같다. 그렇다고 슬퍼지거나 우울해질 것 같지는 않다. 그저.. 그 바람을 함께 맞았던 누군가의 얼굴이 너무 선명해져서 그냥 잠시 동안만 그리움에 취할 것 같다. 그리고 아마 그런 생각을 할 것 같다.
그 누군가가 계절이면 좋겠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기억은 멀어지고 흐려지지만, 세월은 계절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계절은 또 추억을 데리고 온다. 언제는 조금 빠르고, 언제는 조금 느려도 계절은 돌고 돌아오기 마련이다.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았든 계절은 돌아온다.
그래서 한번 상상해 봤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혹한기의 겨울이어도 네가 겨울이었으면 좋겠다고.. 아, 그러면 이번 여름보다도 더 끔찍한 무더위의 여름이어도 좋으니 네가 그 여름이라면 기꺼이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려 꽉 안아줄 것 같다. 아니면.. 이왕 상상 속에서라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을 너로 정해야겠다 생각한다. 나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그때 한껏 부드러워지는 그 바람을 좋아하니 네가 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이지만 그것도 아주 짧은 가을 일지라 해도 그게 너라면 그 가을만 애타게 기다리는 상상을 해본다.
시간이란 게 참 야속하다. 분명 시간이 흘러야 내가 서서히 누군가를 잊을 텐데 시간은 결국 계절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잊힐뻔했던 가을의 그 사람을 기어코 꺼내온다. 가을이 지나면 잊은 줄 알았던 겨울의 그 사람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 나도 세월에 못 이겨, 세월에 속아 그 기억 속 누군가를 아파하지 않고 떠올릴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나는 세월을 믿고 싶지도, 세월에 속아 넘어가기도 싫다.
다시 떠나가고 또 찾아오는 계절처럼 그대가 지금은 잠시 떠나 있는 겨울처럼 언젠간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싶다. 그냥 그래야 지금 떠나가는 여름을 잘 보내줄 수 있을 것 같고,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터무니없는 기다림이라도 있어야 그래야 내가 살아갈 것 같다.
하루하루 점점 더위는 멀어져 갔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 찰나같이 지나간다 해도, 찬바람이 더 자주 많이 불어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처음으로 난 겨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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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