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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05. 2020

찌질했던 지난 연애의 기억마저 소중한 이유

어느 기억 맥시멀 리스트의 기억 활용법


며칠 전 구석구석 방청소를 하던 중 하트가 여러 개 그려진 빨간 선물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항상 책상 밑 어딘가에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못 본 사이 상자 뚜껑 위로 먼지가 제법 쌓여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상자를 열어본지는 정말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그 상자는 자주 내 눈에 띄었지만 의식적으로 못 본 척하기도 했었다. 그 안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 물건들을 보면 달갑지 않은 기억들이 불쑥 나를 찾아와 내 감정선을 흔들고 갈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뽀얗게 쌓여있던 먼지를 닦고 나니 여전히 새빨간 상자 뚜껑 위를 날고 있는 여러 하트들이 날 유혹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한 번 열어봐. 이 안에 너의 찐한 추억들이 가득하잖아. '추억여행' 한 번 해야지.'


여기저기 날아가고 있는 하트 그림들에 홀린 듯 나는 곧장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내 기억과는 다른 물건들부터 내 눈에 들어왔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 소중했던 사람들에게 받은 편지와 사진만 있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초등학교 5학년 성적표부터 날 반겨줬다.


언제 넣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성적표를 걷어내고 바로 밑에 각이 딱딱 맞게 깔끔하게 접혀있는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한테 편지를 써준 친구들의 필체는 거의 기억하는 편인데 정말 처음 보는 '악필 주의!'라는 네 글자가 누구의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이놈에 기억, 추억이 뭔지. 언제나 나를 들었다 놨다 한다. <사진 : 2017. 08. 북인도>




그 편지의 주인공은 정말 의외였다. 많은 상대와 연애를 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편지는 한통도 남기지 않았다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 편지는 우리가 만난 지 200일을 기념해서 쓴 것 같았는데, 꼭 누군가가 대신 받아서 나 몰래 이 상자에 넣어둔 것처럼 처음 읽는 것 같았다. 그 편지 속 그의 말투, 그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과 너무 달라서 어색하기까지 했다.


특히 편지의 마지막 즈음 그 사람이 적은 몇 마디는 꼭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우리가 이렇게 지금까지 예쁘게 잘 만날 수 있는 건 다 슬기가 오빠를 배려해주고 이해해줘서 그런 것 알고 있어.

이렇게 나를 만나주고, 또 사랑해줘서 고마워.

내가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열심히 살고, 더 노력할게.'

(마무리 멘트는 비위가 약해서 생략한다.)


'내가 오빠를 배려하고 이해해준다는 걸 알고 있다고..?'

'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분명 내가 알고 있던,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 사람과 사귈 시절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알게 된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자연스레 떠올랐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TV로 한 토크쇼를 보고 있었다. 그때 이미지가 센 여자 연예인 한 명이 공개 연애를 한 후 그와 관련된 연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TV에 집중해 있던 내게 그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센 여자랑 사귀는 남자 정말 힘들겠다... 어후.."

뜬금없는 그의 한 마디에 나는 무슨 이야기를 이어서 할지 궁금해 그를 바라보며 "응? 왜?"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쳐다보며, 장난 조금과 진심을 가득 담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잘 알지.. (그게 너라는 듯 나를 눈으로 가리키며) 센 여자랑 사귀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때는 농담 섞인 그의 말투와 표정에 같이 가볍게 웃고 넘어갔지만 그 후에도 가끔씩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나를 '센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아 내 연애사를 모두 지켜봐 온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말을 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남자 친구를 이해 못 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나는 '들어주는 사람, 참는 사람'의 역할을 자처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일반적인 친구들과 달리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누는 남자 친구라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표현하고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는, 그것도 사귀었던 남자한테는 더욱더 안 들어본 '센 여자'라는 단어는 내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센 여자가 나쁜 게 아니라 당시 스스로 생각하던 이미지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었다.)




근데 요즘은 종종 특이하다는 소리는 듣고 있어.. <사진 : 2017. 08. 북인도>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그 사람과 나는 결국 기나긴 '싸움-이별-재결합'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치며 그가 그동안 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취준생이던 나와 그의 비슷한 상황 속에서 그는 자주 나와 그 자신을 비교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내가 그 사람보다 취직에 유리한 성적과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좋은 결과를 받거나 어렵게 해낸 일에 대해 그는 칭찬을 아꼈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뭔가 실수를 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았을 때 그는 늘 걱정 섞인 말투와 단호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말했잖아. 오빠가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가 내뱉은 말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마음보다는 '네가 나보다 잘 되지 않아 다행이다'는 마음이 더욱 느껴졌었다. 일종의 질투, 혹은 열등감을 내게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오해일 수도, 착각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느낌이 여러 번 반복된 것으로 봐서는 완전한 착각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딱 이 정도로만 내게 기억되어버린 지나간 사랑이자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래전 그가 '악필 주의!'라고 쓰고는 단정하고 예쁜 글씨로 꽉 채운 그의 편지가 정말 내 기억 속에서는 잊혔던 것이다. 편지지를 자세히 보니 그 당시 그의 집에 놀러 갔을 때 휴지통 가득히 마구 구겨진 편지지 여러 장을 본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구겨져있던 여러 장의 편지지를 보고 혼자 씩 웃었던 게 이제야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편지 속에 그 내용만큼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 진심이 아무리 그 순간뿐이었다 할지라도, 그 진심이 빠르게 변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다행이었다. 가끔 친구들과 지난 연애 이야기 속에 그 사람의 이름 세 글자마저도 내뱉기도, 듣기도 불편했지만 그 시절 속 내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랑을 했고, 받았던 것 같아서.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고마웠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우리의 기억을 마음대로 편집한다. 가끔 어떤 장면은 과장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장면은 실수로든 고의로든 삭제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지나버린 순간, 시절에 대한 기억은 때때로 믿을 수 없다.


끝은 한 없이 아프기만 한 기억을 남겼을지라도, 끝에 인상 찌푸려지는 기억만을 남겼을지라도 그 기억을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니 그 속에 나는 참 염치없이도 많이 웃었고, 사랑받았고, 행복했었다.






지금 아주 힘든 기억만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면 굳이 애써서 떠올려야 할 것이 있다.

그건 어리석은 우리가 너무도 손쉽게 놓쳐버린 행복했던 기억이다.

그때를 자세히 차근히 돌아보면, 세월에 속아 잊고 있었던 '웃고 있던 나', '사랑받던 나'를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라면 조금 더 오래 안고 있어도 된다.

그 시절 속에 사랑받던 내 모습만으로 가끔은 지금의 나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나도, 당신도 오늘 밤에는 두 눈을 감고 아주 잠시라도 "다행이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던 지난 시절 속에 당신을 보며,

생각보다 괜찮은 시절을 살아온 당신을 바라보며,

"그래도 참 다행이야."라고 말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자분들의 공감은 글 쓰는 저에게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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