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타인에게, 세상에게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인 누군가에게
내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S는 정말 '착한' 사람이다. S를 떠올리면 '착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와 우리가 어렴풋이 떠올리는 추상적 의미 모두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이고 싶다. 게다가 S는 밝은 성격과 배려심까지 지니고 있어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S를 좋아한다. 내가 10년 정도 보아온 S의 이런 면은 사회생활을 위한 가면이라기보다 타고난 성격과 성향 자체가 타인을 배려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연도 초반부터 나는 그런 S가 서서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양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이 사회 속에서 S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보다 타인을 너무 생각하고 챙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간혹 사람들과 관계에 있어서 어떤 상황적인 문제, 작은 오해로 인한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S는 그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S가 걱정된 이유는 '진심으로' 대부분의 문제의 탓을 자신이라고 결론을 내면서 그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누가 봐도 S가 아닌 상대방의 잘못으로 인해 트러블이 생겼을 때에도 S는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그저 혼자 참고 삭히기 바빴다.
최근, S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함께 지내는 친한 직장 동료 몇 명과 오해가 생겼고 그 일로 인해 S는 힘들어했다. 나는 S의 이야기만 전해 들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S를 포함한 특정 인물이 잘못해서 생긴 문제 같지 않았다. 하지만 또 S는 이 문제를 그저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내게 물어왔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보아온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S야. 내가 듣기에는 네가 먼저 사과할 이유를 전혀 못 찾겠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먼저 대화를 요청해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너는 항상 네가 먼저 다가가거나 참았던 것 같아. 그럴 때마다 그 순간, 그 상황은 어떻게 해결이 됐지만 결국 그 사람들과의 관계의 끝에서 좋았던 적은 없지 않아..?
이 문제와는 상관없지만 나는 네가 앞으로는 화가 나면 화도 내고, 누구의 탓도 좀 해봤으면 좋겠고, 단호해야 할 때는 관계도 끊어냈으면 좋겠어. 너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 네 마음만 다치는 것 같아."
"사실 나도 알아.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거라는 거. 그런데 나는 누군가한테 할 말을 하는 게, 단호하게 하는 게 왜 이렇게 안될까..? 그게 너무 힘들어. 그래서 그냥 나는 '내 탓이다, 내 잘못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내 마음이 편하니까."
나와 대화를 나눈 후, 결국 S는 그녀의 방식대로 직장 동료들에게 먼저 다가갔고 그 문제는 빠르게 해결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비슷한 문제는 또 일어났고 지금 결국 S는 그들과 회사에서 인사만 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했던 동료 중 한 명은 S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나는 너랑 있으면 넌 너무 착한 사람이고,
나는 계속 나쁜 사람만 되는 것 같아."
그 직장 동료의 마지막 한 마디는 S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되었겠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 동료가 어떤 마음에서 그 말을 남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지켜본 S는 정말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 모두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다. 특히 타인을 대할 때는 나 자신보다도 남을 먼저 배려하고, 때로는 자신이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그것 또한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S의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S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돌보지는 못한 채 타인의 마음과 그 상처에만 관심을 가졌고, 애정을 쏟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의 직장 동료는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한 것 아닐까.
S는 늘 '타인'에게 착했으니까, 아마 처음에 그 직장동료도 S를 그저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좋지 않은 문제에 얽혔을지라도 계속해서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챙기는 S를 옆에 두고 바라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수 있다. 그런 S 옆에서 자신의 처지와 마음을 먼저 챙기기 급급했던 (어쩌면 정말 평범한) 자신은 자꾸만 알 수 없는 자괴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전에 S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냥 나는 '내 탓이다, 내 잘못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내 마음이 편하니까."
이제와 보니 그녀의 마음은 정말 편했던 것이 아니었다. S는 그저 불편한 상황, 관계로 부터 빨리 벗어나고자 자신의 마음이 불편한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로써 S는 이 세상, 주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착한 사람'이 되었지만 스스로에게만큼은 '나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날 S와 나눴던 기나긴 전화 통화의 끝무렵, 나는 이렇게 말했다.
"S야. 너는 나한테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너는 너에게 좋은 사람 같지는 않아.
나는 네가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하는 것만큼, 딱 그만큼만 너에게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 마음이 어떤지, 왜 너의 마음이 아픈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마음이 조금 괜찮아지는지도 알아갔으면 좋겠어. 이를테면, 나처럼 훌쩍 여행을 떠나버린다던가 아니면 친구랑 술을 왕창 먹는다던가, 아니면 쇼핑을 신나게 한다던가. 이런 거 있잖아.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나만 아는 나만의 마음 달래는 방법.
물론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쓸 때 없이 마구 쇼핑을 하는 것도 사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최악의 방법은 네 마음을 외면해버리는 것 같아.
조금씩이라도 네가 너를, 너의 마음을 알아가고 보살폈으면 좋겠어."
S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꼭 그렇게 하겠다고, 듣기 힘든 이야기들을 모두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대화가 더 길어지면 눈물이 왈칵 터져버릴 것 같은 S에게 나는 급하게 다음날 출근 시간이 몇 시냐고 물어보며 전화 통화를 마무리했다.
유독 잠이 잘 오지 않던 그날 밤, 왠지 두 눈이 팅팅 부어있을 그녀가 떠올라 컴컴한 방에서 휴대폰을 더듬더듬 집어 들어 문자 한 통을 보냈다.
"S야.
누군가에게 꼭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한테도 그러지 않아도 돼.
왜냐면 나한테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변치 않으니까.
널 알아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거든.
그러니 널 알아주고, 널 믿는 사람들만 생각하면서 이제는 너에게 가장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잘 자. 친구야."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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