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

#03. 이럴 거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지.

by 기록하는 슬기

제주도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보겠다고 최측근들 4~5명에게 먼저 말했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언제부터 언제까지 머물 거냐고 물어왔다. 내가 제주에 있을 때 시간을 맞춰 나를 보러 오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여러 변수가 있겠지만 만약 제주에서 1박 2일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무리하지 말고 일단은 여러 상황을 지켜보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주에 와준다면 그것만큼 고맙고 기쁜 일도 없겠지만, 이제는 안다. 그들이 오겠다고 한들 대부분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게다가 코로나 19 때문에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에 만약 요즘같이 좋지 않은 상황일 때 온다고 한다면 오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솔직히 말해서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이 없다고 할지라도 가까운 친구 중에 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1~2명뿐이 없을 것이다. 물론 각자의 일상 속 사정이 있고, 이 약속을 의무적으로 꼭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애초에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말은 아예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듣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게 된 계기가 있다. 때는 20대 초반, 나는 대학교를 고향과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내 친구들은 4년 내내 말했었다. 나를 보러 꼭 내가 있는 지역으로 놀러 오겠다고. 고향에서 내가 있는 지역까지 오려면 자가용으로는 1시간 20-30분 정도, 버스를 타면 약 2시간 정도 걸렸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4년 동안 한 번도 못 올 거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관광도시로 유명하고, 찾아오기에 힘든 도시가 아니다.) 그 당시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5~6명이었는데 그중에 다른 약속 때문에 왔다가 잠시 얼굴을 보고 간 친구를 제외하고 온전히 나와의 약속을 지키러 온 친구는 4년 동안 단 한 명이었고, 딱 한 번 왔었다.


한 번이라도 온 게 어디냐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4년 동안 나를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던 횟수에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차라리 티가 확 나는 빈 말처럼 "언제 한 번 시간 될 때 놀러 갈게." 정도의 대사였다면 내가 이렇게 서운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겠다는 친구들은 "이번 주나 다음 주 주말에 갈까?"라는 식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항상 "너네만 오면 난 무조건 오케이지!"라고 말했었다.


나는 기다렸고, 친구들은 늘 급한 이유가 생기거나 바빴다. (가끔은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기대감이 컸던 만큼 실망감도 컸지만 이것도 반복되다 보니 아예 기대 자체를 안 하게 되었다. 오히려 4학년 즈음에는 매일 온다던 친구가 "나 주말에 너한테 가도 돼?"라고 했을 때, "버스표 일단 사고, 버스 타고나서 그때 연락해. 이제 나 안 속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마디를 꼭 더 덧붙였다.

"더 이상 나한테 희망 고문하지 마!"




지키지 못 한 약속이 반복된다면 그 끝에는 결국 '포기'만이 남는다. <2020. 11. 제주 서귀포>



예전에 나도 좋은 감정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조차 잘 모르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 말을 할 당시에는 그 사람이 좋고, 정말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했었지만 거꾸로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혼자 실망하고를 반복하면서 지키지 못할 약속과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내가 오래전 "나 아무래도 바빠서 못 갈 것 같아. 방학 때 너 고향 오면 자주 만나자."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 당시에는 서운할 수도 있었지만 그게 더 책임감 있는 말과 행동인 것을 희망고문을 수차레 당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게 친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꼭 너 보러 갈게!"라는 말을 했을지라도 어떤 사람은 현실적인 여러 상황을 총체적으로 생각하고 한 말인지, 어떤 사람은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마음이 끌리는 대로만 한 말인지 그 차이가 보였다. 평소에 사람마다 크고 작은 약속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하다못해 오랜 기간 동안 '시간 약속'을 어떻게 지키는지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답은 나온다. 이 사람이 자신과의 약속, 타인과의 약속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지를.


누군가와 약속을 할 때 그 당시에는 대부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지키고 싶기에 약속을 한다. 꼭 약속이 아니라도 어떤 말을 할 때도 좋은 감정이 있는 상대방과 함께라면 더욱 마음에서 우러나는 이야기일 것이다. 슬프지만 그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해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내가 알아버렸다면 그 사람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 대해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 약속에 끝에는 실망만이 남았으니까. 내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이제는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고, 또 그 말은 포기했다는 말과 같다.






어떤 약속이든 말이든 100% 지킬 수 있는 것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후, 그다음에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만 보더라도 그 사람이 나와의 약속을 얼마큼 진지하게 생각했고, 책임을 지려고 하는지 느낄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약속과 말은 어쩌면 자신과 하는 약속과 같고, 그 후에 하는 행동은 그 사람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하는 행동과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 말에 무게를 느끼고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후, 나는 상대방에게 빈 말을 포함하여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그 당시, 그 순간 나와 그 상대방의 감정과 분위기를 생각하면 어떤 말이 더 듣기 달콤할지 잘 알지만 이제는 안다.

그 달콤함은 너무도 짧고, 한 번 뱉은 말의 무게와 책임은 영원하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 달콤함이 쓰라린 상처로 남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자분들의 공감과 응원은 글 쓰는 저에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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