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물건에는 나의 모습과 태도가 묻어있다.

#24.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모습이 담긴 물건은 무엇인가요?

by 기록하는 슬기


이번 연도 1월 초 어느 날, 페이스북 메신저에 메시지 한통이 도착했다. 페이스북 메신저는 해외 생활을 할 때 주로 외국인 친구들과 연락을 하기 위해서 이용했던 어플이라 한국에 정착하고 나서는 이 어플이 아직 내 휴대폰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쓰지 않았었다. 당연히 외국인 친구에게 온 영어 메시지겠거니 하고 열어 본 어플에는 어딘가 낯익은 한국 남성분의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그 프로필 사진의 주인공은 실제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페이스북이 한창 활성화됐던 시기에 맺었던 페이스북 친구였다.


그분이 보내온 메시지의 핵심 내용은 '현재 00000 팟캐스트 PD로 활동 중인데, 슬기님을 게스트로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PD님은 현재 방송을 하고 계신 링크를 보내주시면서 내가 출연할 프로그램의 기본 틀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지난 방송분을 몇 개 듣고 나니 어떤 느낌의 팟캐스트인지 대략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는 출연하기로 했다. 한때 진지하게 라디오 PD를 꿈꿨을 정도로 학창 시절 라디오 광팬이던 나에게는 이보다 매력적인 제안이 없었다.


연락하던 당시에는 코로나 19의 존재 자체를 모르던 시기라 PD님과 나는 다음 달인 2월 중순에 방송을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PD님께서는 방송에 필요한 준비물이 하나 있다고 하셨다. 내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게스트가 하나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그 물건에 관련된 추억이라던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토크를 나누는 형식이라고 설명해주셨다. 방송에 참고가 될 거라며 나와 비슷한 느낌의 게스트였던 세계 여행 후에 그림을 계속 그리면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게스트 분의 방송파일을 포함해 2~3개 정도의 파일을 함께 보내주셨다.


보내주신 음성파일을 들어보니 이전에 출연하셨던 게스트분들이 가지고 오신 물건들은 제각각 모두 달랐고, 그 물건을 가지고 온 이유와 그 의미 또한 천차만별로 달랐다. 그때부터 틈날 때마다 '나는 어떤 물건을 가져가야 할지, 어떤 물건이 방송에서 이야기하기 재미있을지' 고민이 됐다. PD님이 나를 게스트로 초대한 이유가 세계 여행과 워홀의 경험이 있다는 게 크다 보니 그 기억과 관련된 물건을 고르려고 했다. 그런데 1년 7개월이 넘는 시간이었음에도 나의 어떤 이야기나 의미가 있는 물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생각나는 것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카메라나 그 당시 매일 쓰던 다이어리 같은 것뿐이었다.




P20200401_181808714_E12A62C3-71BB-4B67-8885-CBD5EF41A9F2.JPG 나름의 스토리들이 담겨있는, 내가 아끼는 카메라들.




이번 연도가 11일 남은 오늘, 그래서 그 팟캐스트는 녹음을 했냐고 물어본다면 결론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 같다. 안타깝게 팟캐스트 방송국이 있는 동네 근처도 못 갔다. 더 아까운 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 장기화가 될 줄 모르고 그때 나는 가져갈 물건을 다 정해놓았었다는 것. 그때 고심 끝에 고르고 고른, 만약에 코로나 19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팟캐스트 방송국에 들고 갈 물건은.. 두구두구.. 바로!

세계 여행이랑 호주 워홀 때까지 내 집이자 짐이 돼주었던 38L 배낭이 아닌, 그 배낭을 덮어주었던 '배낭 커버'였다.


보통 장기 여행을 갈 때는 등산용 매장에서 리터(L)가 큰 배낭을 산다. 등산용 배낭인 만큼 배낭 자체의 소재는 가볍고 잘 찢어지지 않는 튼튼한 천으로 만들어지지만, 배낭을 겉에 덮는 커버는 비를 맞지 않게 해 주고, 배낭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얇고 잘 찢어지는 재질이다. 그래서 많은 장기 여행자들은 여행 도중에 커버가 찢어지거나 더러워지면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 내 배낭 커버도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짐을 옮기던 도중에 2~3개의 작은 구멍이 생겼는데 그때는 정말 큰 일이라도 난 듯 엄청 속상해했었다.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청테이프로 구멍 난 곳을 붙이는 응급 처지를 했는데, 그 후로는 배낭 커버에 까만 먼지가 묻든 짐 칸에서 꺼내다가 옆구리 쪽에 크고 작은 구멍이 생겨도 그때처럼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짐 정리를 대대적으로 하는데 정말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된 배낭 커버가 그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이제는 버릴 때가 된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배낭 커버를 몇 번이나 비누로 손빨래를 하고 햇볕에 싹 말린 후 구석구석 청테이프로 다시 구멍 난 부분을 메웠다. 그리고 그 배낭 커버로 배낭을 덮은 채로 1년 7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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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택시타고 내리다가 구멍난 거 발견하고 마음 찢어졌었다.. <사진 : 2017. 05. 장기여행 애송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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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니까 점점 미안해지네.. 그래도 마지막 호주에서는 섬유유연제까지 풀어서 빨았다구.. <사진 : 내 여행의 산 증인, 배낭 커버님의 역사>



이 배낭 커버를 보면 지난 여행이나 워홀의 기억이 떠오른다기보다 내가 지금까지 '물건이나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한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모든 물건이나 사람에게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고심 끝에 정말 필요해서 큰 맘먹고 구매한 물건이나 정말 내게 필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쉽게 버리지도 바꾸지도 못한다. 물건이라고 한다면 그 물건의 본래 '쓰임'이 아예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관리를 하면서 오래 쓰는 편이고,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다시 주고 나서 그 사람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과 좋은 가치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을 때 그제야 관계를 정리한다.


초록색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낡은 배낭 커버는 아직도 내 방에 곱게 접혀있다. 아직은 이 배낭 커버는 비도 막아주고, 내 배낭을 보호해주니 조금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배낭 커버를 쓴 기간보다도 더 짧게 끝나버린 몇몇의 인연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슬프지만 그들과 나는 이 배낭 커버 보다도 질기지 못한, 서로에게 그 정도의 쓸모가 없는 인연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이제는 어두운 핑크색이 돼버린 이 배낭 커버를 꺼내서 팟캐스트 방송국에 갈 수 있는 날이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아니지, 이 배낭 커버를 정말 배낭 위에 씌워서 다시 내 어깨 위에 올려놓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그런데 진심으로 팟캐스트는 언젠가 출연하고 싶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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