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약속이 아닌 미련 덩어리들의 마지막 발악 같은 거랄까.
어렸을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장면이 있다.
서로를 위해 헤어져야 하는 남녀 주인공이 이런 약속을 한다.
"우리 5년 뒤 첫눈이 내리는 날 00역 앞에서 만나요."
곧이어 그 둘은 말도 안 되는 약속에 동의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찬 서로의 두 눈을 한참을 바라보고 이내 뒤돌아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지금이야 서로의 삶을 위한 이별을 머리로 이해하긴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런 이별도, 그리고 이어지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약속을 하고 5년 뒤 첫눈 내리는 날, 나만 그 약속을 기억하고 나 혼자 그 00역 앞에서 처량하게 첫눈을 맞고 있다면 그건 더 슬픈 거 아닌가?, 누가 기억을 했든 둘 중 한 명만 기억하고 그 약속 장소에 나왔다면 차라리 헤어지던 당시 그런 약속을 애초에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불과 1~2년 전부터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하는 마음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서로를 위한' 이별을 한 적은 아직 없지만 '혼자'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혼자 모든 결정을 내리고, 혼자 이별을 통보하고 난 뒤에 그 이별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나서부터였다.
작년 여름, 홀로 뒤늦은 이별 한가운데에서 그 아픔과 미련, 후회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는 쉴 새 없이 굵은 빗방울들이 하염없이 내렸다. TV에서는 기록적인 폭우라며 뉴스특보를 방송했다. 나가지도 못하고 창가에 서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득 '첫눈'이 떠올랐다.
'지금 하늘에서 내리는 게 빗방울이 아니라 눈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그 눈이 이번 연도에 첫눈이라면 어떨까,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과 헤어질 때 "우리 3년 뒤 첫눈이 내리는 날, 우리가 자주 가던 00역 좁은 골목길에 있는 아늑한 노란빛이 그득한 작은 포차에서 만나자."라는 실없는 약속이라도 해볼걸 그랬나..'라는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당연히 그런 약속을 했을지라도, 그리고 정말 3년 뒤 우리 둘 중 한 명 혹은 둘 다 그 약속을 기억했을지라도 그 약속 장소에 가서 만난다는 건 확률적으로 거의 1%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그 약속이란 정말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약속이라기보다 일종의 '꿈'이자 '희망' 같은 것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한 날,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마음속에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이나 희망'이 있으면 그래도 견딜만한 힘이 생기지 않나. 바로 그거였다. 어렸을 때 봤던 영화와 드라마 속 커플들의 약속은 정말 지키기 위한 약속이 아니었다. 이별 후 내 삶과 내 일상을 견디기 위한 꿈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서 그 꿈이 변하고 잊힐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버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마취제 같은 그런 꿈같은 것.
작년 여름, 뒤늦은 시련에 실컷 아파하고 난 뒤 정작 작년 겨울 '첫눈'이 내렸을 때는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첫눈이 언제 왔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람이라는 '꿈'과 '희망'이 희미해지면서 동시에 이룰 수 없는 가짜 '꿈'이었던 상상 속 그 '약속'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결국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감정', 그중에도 마지막이 되고 더 시간이 지나서야 증발되는 '미련'과 같았다.
올해 나는 '첫눈'이 언제 내렸는지도 모른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가끔 녹지 않는 눈 자국을 보고 '눈이 왔었구나..'라고 인지하는 정도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눈방울을 떠올렸던, 그러면서 첫눈을 떠올리고, 말도 안 되는 '약속'을 상상하고, '후회'와 '미련'이 가득한 '꿈'을 꾸던 나는 이미 사라졌나 보다.
지금 나는 이렇게 텅 빈 내 마음의 상태를 좋아하지만 지난날에 헛된 약속을 상상하던 나의 마음 또한 애틋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 비현실적인 약속을 상상할 정도로 그 사람을, 그 시간을 사랑했었다는 뜻이니까.
그만큼 간절했던 내 진심을 처음 느껴봤으니까.
무엇보다도 이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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