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실수'라는 말 뒤에 숨어버리는 사람
며칠 전, 유명 연애 유튜버 김달 님의 영상 하나를 봤다. 그 영상에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이성'에 대해 시청자들과 댓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하게 집중해야 하는 영상이 아닌 경우에 영상을 틀어놓고 댓글부터 스캔하는데, 맨 위에 있는 베스트 댓글을 읽자마자 진짜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댓글은 다음과 같다.
"술 취해서 실수했다는 말 뱉는 사람 거르세요.
술 아무리 많이 마셔도
똥 퍼먹진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특히나 '술'은 실수의 베스트 프렌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술'을 마시면 아무래도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술을 먹고 잊고 싶은 기억을 자발적으로 생산하곤 한다.
나는 내가 술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지금까지 길고 짧게 만났던 남자 친구들, 썸남들도 대부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알 거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마시는 술자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달콤하다는 것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다른 목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술을 과하게 마신다면 다양한 방면으로 실수하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내가 겪었던 전 남자 친구의 최악의 술 먹고 한 '실수'를 꼽으라면 1순위는 단연코 다른 이성과의 문제였다. 그 사람을 당시에 너무 믿어서, 그 사람의 성격과 성향을 믿고 있어서 다른 건 몰라도 '술과 여자' 때문에 나에게 상처를 줄지 몰랐다. (이 사건은 진짜 역대급 사연이라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만 해도 부글부글하다.)
그다음으로 2순위는 별 일 아닐 수도 있지만 내게 '실수'라는 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 사건이다. 남자 친구는 아니고 과거 썸남과 있던 일이다. 썸을 막 타기 시작할 무렵, 매일 연락을 하다가 두 번째 약속을 잡은 날이었다. 썸남과 나는 관심사, 성향, 성격, 게다가 입맛까지 서로 정말 닮아있었다. 예쁘고 근사한 레스토랑보다는 조금은 아담하고 허름한 고깃집에서 소주 한 잔을 좋아하는 것까지. 그날도 우리는 뜨거운 불판을 사이에 두고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눴고 서로를 바라보며 부딪히는 소주잔의 횟수도 그만큼 늘어갔다.
온몸에 퍼진 알딸딸함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지만 우리는 2차를 끝으로 오늘의 만남을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그 썸남은 내가 탈 버스를 기다려준다고 했고 우리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함께 걸어가면서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봤는데 이미 그의 눈은 취기에 가득 차 보였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노란 글씨로 '000번 버스 도착 10분 전'이라고 떠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많이 취해 보이는 그에게 말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먼저 들어가 보셔도 돼요. 저 버스 10분 뒤면 온데요. 어? 9분 뒤에 온데요. 집에 들어가서 연락드릴 테니 걱정 말고 얼른 들어가세요."
그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눈빛과 몸짓으로 무조건 자기는 '괜찮다'며 나 들어가는 걸 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정류장에는 그와 나 단둘이 밖에 없었고 우리는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버스 도착 4분 전이라고 글씨가 막 바뀌었을 때쯤, 그는 갑자기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나를 안으려고 했고 본능적으로 나는 밀어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나보다 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그에게 갖고 있던 호감 때문이었는지 그의 사과를 받아줬다. 그리고 40분 같은 4분이 흐르고 나는 드디어 버스에 올라탔다.
사실 '썸'이라는 애매한 감정 줄다리기 중인 성인 남녀가 함께 술을 마시고, 그 분위기 취해 서로 합의하에 스킨십을 할 수는 있다. 둘 중 그 누구라도 원치 않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만 그날 썸남은 바로 사과를 했기에 나는 그다지 그의 행동을 심각하게 궁서체로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와 연락을 평소처럼 하긴 했지만 그의 말투는 뭔가 예전 같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왠지 그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한테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으니 그와 연락하는 내가 더 답답했다. 그러던 중 내가 먼저 그에게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날 이후로 뭔가 모르게 어색함이 생겨버린 우리는 만난 뒤 한참 동안 우리와는 상관없는 겉도는 이야기들을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아 나는 그에게 먼저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입을 뗐다.
"아.. 사실은 저 정말 그날 너무 '후회'했어요. 제가 '술'먹고 '실수'했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더라고요.."
이게 다 였다.
사실 그 썸남이 말하는 '후회'가 어떤 의미인지, '실수'가 어떤 실수인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썸남은 그날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실수'라는 그 짧은 단어로 그날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다 덮어버렸다. 나는 그 썸남에 대해 호감이 있었기에, 그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고 다 털어내려고 만들었던 자리였는데 그는 또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날 썸남을 만난 후 나는 오히려 마음이 싹 정리가 됐다. 그날 내가 느낀 그 사람은 '술'을 먹고 '실수' 했다기보다 그 순간의 자신의 기분, 감정, 감성, 분위기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의 행동을 직면하지 않고 '실수'라는 단어 뒤로 숨는 사람 같았다.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우리는 인간이기에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그 실수 중에 가장 해서는 안될 실수는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보는 행동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실수를 하게 됐다면 그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다. 우리도 알지 않나.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라는 것을. 그래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만큼, 어쩌면 더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고 난 후의 자신의 실수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와 행동이 아닐까.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행동은 술에 취하든 뭐 어떤 것에 취하든 '실수'라는 단어를 애초에 붙일 수 없다. 그건 실수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진심인 것이고,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인 것이다.
이글에는 자세히 쓰지 않았지만 한 명의 구 남친이 지겹도록 내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미안해.. 어젠.. 정말 술 먹고 실수했어. 술이 문제야.. 진짜 앞으로는 조심할게!"
그때는 말 못 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앞으로 조심하지 않아도 돼. 너는 앞으로도 조심해도 그럴 거니까. 왜냐면 술이 문제가 아니라 너란 사람이 문제거든. 마지막으로 너랑 나는 이제 '앞으로'는 없으니까 더 조심할 필요는 없어."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읽어주시고, 느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꾸준히,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겠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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