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잊히고, 잊어가는 것.

언젠가는 놓아주어야 할 기억에 대해.

by 기록하는 슬기



나는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어딘가를 다녀오고, 누군가를 만난 후에 그 여운이 오래가는 편이다. 까다롭고 예민한 성격 탓에 마음에 드는 영화, 책, 사람, 장소 등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한번 내 마음속에 들어오고 나면 그 이후에는 나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오랫동안 그 기억을 붙잡고 살아가곤 한다.



2014, 캄보디아 어딘가.



특히나 근래에 내가 가장 놓아주기 힘들었던 기억은 여행의 기억이었다. 2014년 겨울 혼자 한 달 동안 떠났던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은 내게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안겨주었다. 여행 다니는 내내 '이렇게 마냥 행복해도 되는 걸까' 불안하다 싶을 정도로 즐거웠고, 만난 인연들 모두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여행이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였다. 하나, 둘 사라지는 여행에서의 기억과 추억들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 기억들을 조금이라도 더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 같다. 혼자 있을 때면 자꾸 그때가 생각이 나서 너무도 우울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여행 이야기하는 것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TV에서 동남아 여행을 떠난 프로그램이 나오면 평소에는 시간까지 체크해가며 챙겨봤을 테지만 오히려 그 TV 화면을 5분 이상 보지 못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함께 추억을 나눴던 사람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에 쉽게 적응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 모습마저 내게는 야속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우리의 기억과 추억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그 기억을 놓아줘버린 듯 한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한국에서도 여행을 그리워하고 또 지나간 그때를 조금이라도 덜 놓치기 위해 그 장면들을 계속 떠올렸다. 이렇게 여행 후유증은 새로운 기억들이 자리를 잡기까지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과 마음속을 계속 괴롭혔다.



2014, 캄보디아. 바다 같던 톤레삽 호수에서.



그리고 이번 장기 여행(2017년)이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며칠 사이에 바뀌는 장소들, 인연들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만남과 이별은 생각보다 더 잦았고 건조했다. 어느 곳, 누구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도 좋을 때면 '이것 또한 지나가겠지, 다신 오지 않겠지, 그리고는 이때를 난 또 그리워하겠지..'라고 생각하며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그 순간의 감정보다는 지나고 나서의 상황을 더 걱정했기에.


아마도 이건 29년 동안 이렇게 살아온 내 삶의 습관이 아닌가 싶다. 감정이 충만해져서 이성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미리 앞날을 걱정하며 그 상황에서 항상 한쪽 발은 빼놓고 있던 습관, 그리고는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제야 그 기억들이 혹여나 새어나갈까 꽉 부여잡던 습관.




2014,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여행이 계속되면서 나는 이런 반복되는 감정 소모에 지쳐갔고, 집 떠난 지 70일이 훌쩍 넘은 요즘 새롭게 드는 생각이 있다. 아무리 내게 특별하더라도 기억, 추억은 흘러가는 대로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비단 여행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장소에 대한, 그 어떤 것에 대한 기억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잊고 싶은 기억일지 언정 억지로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듯, 잊고 싶지 않은 기억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억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바람이 제멋대로 불어오듯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 기억이 흘러가버려도 그때의 나, 우리가 그곳,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기에.

그래서 여행 속 함께했던 시간들이 누군가에게 잊히고, 또 내가 그 시간을 잊어가는 것은 그리 두려운 일만은 아니다.


앞으로 삶이라는 긴 여행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누군가를, 어딘가를 잊어갈 테고 또 잊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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