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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Jun 24. 2024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지만 나답게 살고 싶어요.

불안해도, '나'를 잃지 않고 싶은 어느 30대의 이야기


"야.. 어쩜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냐.."

오래된 친구 K는 내 맞은편에 앉아 소주 한 잔을 들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난 내 앞에 놓인 소주잔을 냉큼 들어 올려 K의 잔에 살짝 부딪히고는 소주 한 잔을 목구멍 뒤로 밀어 넣는다. 10년 넘게 마셔온 소주인데, 소주는 늘 쓰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크으.." 작은 추임새를 낸다. 코에는 익숙한 알콜향이, 혀에는 불쾌하지 않을 만큼의 단 맛이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목 뒤로 넘겨버린 게 소주 한 잔인지, K의 저 말 한마디인지 모르겠다. 


어느덧 친구의 슬픔이 묻은 한 마디에 아무 말 없이 소주잔을 들어 올려 위로해 주는 게 익숙한 30대 중반이 됐다. 오늘 우리가 마시는 이 에탄올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차가운 에탄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그저 쓰고도 단, 달고도 쓴 이 한 잔이 우리의 불안, 슬픔, 답답함을 아주 잠시나마 잊혀주길 바랄 뿐이다.


"야.. 어쩜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냐.."라는 친구의 한마디에 답으로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니야! 우리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해결될 거야~!"


글쎄. 아마 20대 초반 정도였다면 나는 친구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호기롭게 저 말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버렸다. 쓰고도 단, 달고도 쓴 소주와 같은 이 놈에 인생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디폴트라는 것을. 언제나 일도, 사랑도, 사람도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었다. 그렇게 겪었으면서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늘 익숙하지 않다. 마실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 소주 한 잔의 쓴 맛처럼 말이다.



일기예보와 달리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인생에서의 소나기 또한 늘 '갑자기'다. <사진 : 예상보다 오래 내리던 비. 베트남 사파에서 하노이로 향하는 버스 안. 2024>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이 힘든 이유는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단순히 내 뜻대로 되지 않기에 이 삶이 힘든 것은 아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설사 내 마음대로 어떠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음에도 '이 행복은 언젠가 깨지겠지? 삶은 늘 그랬듯 제멋대로겠지?'라는 생각에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살면 살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안정'을 꿈꾼다. 


억지로 깬 아침과 잠들 수 없는 밤을 셀 수 없이 살아내면서 온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삶은 불안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불안이 기본값인 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 답은 살아가며 계속해서 바뀔 것이다. 만약 이 질문을 내가 10대, 20대 때 받았다면 '의지, 노력, 끈기'와 같은 것으로 삶을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불안함을 삶에서 지울 수 있을 거라고 확신에 차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된 나의 정답은 바뀌었다. 지금 내 정답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관적으로 '인생은 원래 힘든 거야.'의 마음이 아니다. 난 지금까지 내가 직접 겪고 살아온 삶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특히 삶의 시작부터 돌아가 보면 이 삶의 기본값이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나왔을 때부터 내 마음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불안'을 잠시 잊고 '기대'라는 것을 하기도 한다. <사진 : 우연히 만난 노을과 윤슬. 베트남 하노이. 2024>



맞다. 삶이란 시작부터 '내 마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투성이이고, 우리 삶은 불안함으로 가득 차있다. 이렇게 타고난 삶에서 무작정 안정을 쫓기보다 나의 불안을 지긋이 바라보고, 나의 불안을 알아야 한다. 나의 불안과 친해져야 한다. 삶의 또 다른 과제 중 하나는 나의 불안을 잘 데리고 살아가는 것이니까.


이렇게 앞으로 계속될 불안이라는 여정을 걸어가야 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더 있다. 

가끔 맛보는 '즐거움, 안정, 희망'과 같은 단어를 내 삶에서 굳이 굳이 더 찾아보고, 자꾸만 꺼내보는 일.

그리고 내가 불안이라는 길 위를 걷고 있듯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 또한 어둡고 컴컴한 길 위를 걷는 동행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더 나아가 서로 닮은 불안을 공유하고, 응원하며 우리의 앞 길에 은은한 빛을 비추어 주는 일. 







월요일마다 연재했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도대체 뭐죠' 브런치북은 여기서 마칩니다.

이 브런치 북은 안정과는 거리가 먼 30대 한 여자의 불안한 일, 사랑, 사람에 대해 쓴 글입니다. 

(실제 연재 순서도 일-사랑-사람 순입니다.)


아마 저는 지금처럼 계속 불안이라는 이 길 위를 헤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연재하면서 이 길 위를 어떻게 하면 '나답게' 걸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는 찾았습니다.

단어로 설명하자면 '받아들임'과 '동행'입니다.

나의 불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리고 우리 서로 닮은 불안을 알아주며 함께 걸어 나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제 불안한 삶과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닿아 때로는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언제나 제 글이 올라오면 공감 버튼 꾹 눌러주시는 구독자분들과 정성 가득 담긴 댓글 남겨주시는 구독자분들, 그리고 제 창작 활동을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곧 다음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록하는 슬기, 이슬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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