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도, '나'를 잃지 않고 싶은 어느 30대의 이야기
"야.. 어쩜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냐.."
오래된 친구 K는 내 맞은편에 앉아 소주 한 잔을 들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난 내 앞에 놓인 소주잔을 냉큼 들어 올려 K의 잔에 살짝 부딪히고는 소주 한 잔을 목구멍 뒤로 밀어 넣는다. 10년 넘게 마셔온 소주인데, 소주는 늘 쓰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크으.." 작은 추임새를 낸다. 코에는 익숙한 알콜향이, 혀에는 불쾌하지 않을 만큼의 단 맛이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목 뒤로 넘겨버린 게 소주 한 잔인지, K의 저 말 한마디인지 모르겠다.
어느덧 친구의 슬픔이 묻은 한 마디에 아무 말 없이 소주잔을 들어 올려 위로해 주는 게 익숙한 30대 중반이 됐다. 오늘 우리가 마시는 이 에탄올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차가운 에탄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그저 쓰고도 단, 달고도 쓴 이 한 잔이 우리의 불안, 슬픔, 답답함을 아주 잠시나마 잊혀주길 바랄 뿐이다.
"야.. 어쩜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냐.."라는 친구의 한마디에 답으로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니야! 우리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해결될 거야~!"
글쎄. 아마 20대 초반 정도였다면 나는 친구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호기롭게 저 말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버렸다. 쓰고도 단, 달고도 쓴 소주와 같은 이 놈에 인생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디폴트라는 것을. 언제나 일도, 사랑도, 사람도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었다. 그렇게 겪었으면서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늘 익숙하지 않다. 마실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 소주 한 잔의 쓴 맛처럼 말이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이 힘든 이유는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단순히 내 뜻대로 되지 않기에 이 삶이 힘든 것은 아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설사 내 마음대로 어떠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음에도 '이 행복은 언젠가 깨지겠지? 삶은 늘 그랬듯 제멋대로겠지?'라는 생각에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살면 살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안정'을 꿈꾼다.
억지로 깬 아침과 잠들 수 없는 밤을 셀 수 없이 살아내면서 온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삶은 불안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불안이 기본값인 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 답은 살아가며 계속해서 바뀔 것이다. 만약 이 질문을 내가 10대, 20대 때 받았다면 '의지, 노력, 끈기'와 같은 것으로 삶을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불안함을 삶에서 지울 수 있을 거라고 확신에 차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된 나의 정답은 바뀌었다. 지금 내 정답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관적으로 '인생은 원래 힘든 거야.'의 마음이 아니다. 난 지금까지 내가 직접 겪고 살아온 삶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특히 삶의 시작부터 돌아가 보면 이 삶의 기본값이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나왔을 때부터 내 마음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맞다. 삶이란 시작부터 '내 마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투성이이고, 또 우리 삶은 불안함으로 가득 차있다. 이렇게 타고난 삶에서 무작정 안정을 쫓기보다 나의 불안을 지긋이 바라보고, 나의 불안을 알아야 한다. 나의 불안과 친해져야 한다. 삶의 또 다른 과제 중 하나는 나의 불안을 잘 데리고 살아가는 것이니까.
이렇게 앞으로 계속될 불안이라는 여정을 걸어가야 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더 있다.
가끔 맛보는 '즐거움, 안정, 희망'과 같은 단어를 내 삶에서 굳이 굳이 더 찾아보고, 자꾸만 꺼내보는 일.
그리고 내가 불안이라는 길 위를 걷고 있듯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 또한 어둡고 컴컴한 길 위를 걷는 동행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더 나아가 서로 닮은 불안을 공유하고, 응원하며 우리의 앞 길에 은은한 빛을 비추어 주는 일.
월요일마다 연재했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도대체 뭐죠' 브런치북은 여기서 마칩니다.
이 브런치 북은 안정과는 거리가 먼 30대 한 여자의 불안한 일, 사랑, 사람에 대해 쓴 글입니다.
(실제 연재 순서도 일-사랑-사람 순입니다.)
아마 저는 지금처럼 계속 불안이라는 이 길 위를 헤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연재하면서 이 길 위를 어떻게 하면 '나답게' 걸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는 찾았습니다.
단어로 설명하자면 '받아들임'과 '동행'입니다.
나의 불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리고 우리 서로 닮은 불안을 알아주며 함께 걸어 나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제 불안한 삶과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닿아 때로는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언제나 제 글이 올라오면 공감 버튼 꾹 눌러주시는 구독자분들과 정성 가득 담긴 댓글 남겨주시는 구독자분들, 그리고 제 창작 활동을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곧 다음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록하는 슬기, 이슬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