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한승 Jan 23. 2020

 꼴랑 차장이?

나의 잘못을 CEO에게 알리지 말라~

 그 기획서를 만드는데 여섯 달이 넘게 걸렸다.  그동안 정말 단 하루도 쉬지를 못했다.  매일 11시 40분에 지나가는  마지막 전철을 타고 퇴근해야 했고, 토요일 일요일도 쉴 수 없었다.


생명이 메말라 가는 느낌었다.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경영진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기획안을 만든 다음 회의에 올려 다듬는 일이 그동안 무한 반복되었다.


스트레스가 위경련으로 이어진 것도 여러 번이었고,  체중도 10킬로 정도 빠졌다.

직속 상사는 기획서의 오탈자에만 집착했고, 내용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CEO에게  중간보고를 할 때면 그의 갑질이 빛을 발했다.  파워포인트로 브리핑 자료를 만들고 나면 오탈자는 물론, 서체와 색깔, 글자 크기, 배경 색상이나 그림 등이 전부 잔소리 대상이 되었고, 그는 지칠 줄을 몰랐다.


내용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로 밤을 새우고 나면 정말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월에 시작한 일이  9월 말이 되자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제 CEO의 결재를 받고 이사회에 올리면 끝이었다.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일을 해 왔고, 나는 고생할 만큼 했으므로 윗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기획서에는 회사의 장기 마스터플랜이 담겨있었다.  앞으로 10년간 회사에서 이루고자 하는 일들이 각  사업분야별로  비교적 상세히 포함되었고,  법령을 개정해야 할 사항들도 들어있었다.


직원들은 CEO를 두려워했다. 그는 부하들을 잔인하게 다뤘다.  그의 눈 밖에 나면 누명을 씌워 해고를 하거나 좌천시켰다. 6개월 사이  해고된 국장이 두 명이었고, 징계가 진행 중인 직원도 몇 명 있었는데,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들 했다.


그는 신뢰를 매우 강조했는데, 실국장들이 보고를 한 내용을 전부 기록한 후, 나중에 상황이 바뀌어  변경되기라도 하면 자신을 속인 것으로 몰아붙였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여섯 달 동안 만들었던 기획서를 CEO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고, 책으로 인쇄를 해서 이사회에 보고한 후 의결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드디어 쉴 수 있게 될 것이고, 칭찬도 받도, 재수 좋으면 휴가도 갈 수 있으리라.

막차를 놓쳐 택시를 타느라 한 번에 몇 만 원씩 택시비를 쓸 일도 없을 것이고,  승진해서 아내에게 자랑할 것도 기대되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보고가 있는 날 부장이 급한 볼일이 있다며 휴가를 냈다. 난 의아했지만 상사가 휴가를 간들 부하직원이 뭐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기획서를 가지고 파워포인트 갑질 국장에게 보고를  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직접 CEO에게 보고 하도록 해, 기획서의 내용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그가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하고  CEO 집무실에 들어가 그동안 마련한 기획서에 대해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꼴랑 차장이 감히 나에게 보고를 하겠다고? 내가 그동안 그 기획서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국장도 아니고, 부장도 아니고, 꼴랑 차장이 보고를 하겠다고!"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 지더니 7층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졌다.


다들  놀라 기겁을 했고, 나는 초주검이 되어 집무실에서 쫓겨 나와야 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온갖 고생이 무슨 소용이 있었단 말인가. 낙담을 하고 국장에게 가서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이미 CEO가 대단히 화를 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내가 당신에게  보고 들어가라고 한 것 CEO에게 말했어 안 했어?"

안 했다고 보고를 하자 그는 내게 처음 칭찬을 했다.

"정말 잘했어"


〈그림 by 유예린〉


매거진의 이전글 돈 내면 안 잡아먹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