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의 장례식
남편의 할머니들은 두분 다, 우리가 결혼 하던 해에 돌아가셨다.
이미 부모님들께 인사도 드렸고, 결혼 얘기도 오가고 있던 참이라 고민하다가 가기로 했다.
친정은 적당히 보수적이고, 나에게는 '집안에서 장손 제끼고 태어난 큰딸이 해야하는 역할'이 몸에 배어있었다.
시아버지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는, 허리도 못펴고 상을 차렸다가 치웠다.
틈틈이 시아버지가 불러서 자랑스럽게 인사도 시켰다. '우리 며느리될 아이'라고.
굉장히 늦은밤, 거의 모든 손님들이 빠져나간 뒤였는데, 남편의 큰어머니가 도도하게 '얘, 여기도 상좀 차려' 라고 말씀 하셨다.
늦게온 귀한 손님인줄 알았는데, 다 차리고 보니, 남편의 사촌 형제들 이었다.
남편의 큰어머니께서, 할머니 장례식에 온 본인 자식들의 식사를, 조카의 처음 만난 여자친구에게 차리게 한거다.
아, 내팔자 내가 꼰다는게 이거구나.
5년이 지난 지금도, 굉장히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도우미들 퇴근하고 몰린 손님들 힘겹게 응대하는 '그 집 며느리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꾹 참았다면, 이렇게 내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을까.
동시에 10년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장례식이 생각났다.
10남매인 엄마네 식구들은 다들 그래도 나쁘지 않게 성공해서 손님이 너무 많았다.
아침 9시 부터 밤 10시까지 앉을 틈이 없었다.
그 와중에 사촌 동생들에게 'ㅇㅇ아, 엄마 손님오셨다. 그건 언니가 할테니까 가서 인사드리고 와'
'ㅇㅇ아, 술 다 떨어졌다. 술만 좀 채워 놓고 가서 좀 쉬다와. 누나가 보고있을게' 등등의 대사를 치던 나는 정말 정신이라고는 차릴 수가 없었다.
10살부터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쳤던 나를, 우리 엄마는 내가 20대 중반이 넘어서야 잘못 키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어릴때는 젊었던 엄마는, 주방일을 잘 모르는 새댁들이 욕을 먹는걸 보고, 딸을 그렇게 키우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란 나는, 일을 사서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50대에 본인 아버지의 장례식 장에서, 엄마는 쉴새없이 일만 하는 딸을 보고 후회 했다고 한다. 딸을 잘못 키웠다고.
시아버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달 뒤에, 시어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길을 내내 지키고 싶어하던 시어머니는 병간호에 지쳐 쓰러지셨고, 입원을 하셨다.
나는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했다.
손님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남편의 이모들은 이미 쉬고있는 나에게 끊임없이 쉬어라, 누워라, 자라 며 어화둥둥 우리 애기 취급을 하셨다.
후일 들은 이야기로는, 남편의 이모들은 시어머니도 없는 자리에 먼길을 마다 않고 와준 그 자체로 그저 예쁘다며 칭찬을 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아직도 그때 얘기를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내게 고마워서.
결혼 하기 전에 친정 엄마 고슴도치는, '너를 안예뻐하는 시댁이 어디있겠냐' 라고 했다.
거기에 나는, '엄마 며느리 꼴보기 싫을려면 잘 웃어도 여우처럼 웃는다고 싫어해' 라고 대답했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장례식장 구석에 누워 아들에게 안마를 받고 있어도 그 자리를 채워준 마음을 고마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혼전에 예단과 혼수를 바라며 우리 아들은 결혼이 급하지 않다고 하셨던 시어머니는, 몇가지 사건들을 함께 지나오면서 지금은 며느리가 곰팡이핀 빵을 먹어야 장염이 낫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며느리 바보가 됐다.
그때 내가 남편과 헤어졌다면, 시어머니와 거리를 뒀다면 지금의 관계는 없었겠지.
관계는 유기적이고, 변화 무쌍하다.
내 팔자 내가 꼬듯이 살았어도,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키웠어도,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
우리 할머니들은 애낳고 다음날 밭을 매러 나갔어도, 우리 엄마들은 애 낳고 한달만에 회사를 나갔어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비난 받지 않아도 괜찮다.
또한, 그렇게 살지 않는 다고 뭐가 힘드냐고 물음을 받을 필요도 없다.
예전에 비해서 살기 나아졌다는게, 지금은 살기 좋다는 말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