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씀의 가성비

삶의 적나라함 속에서

by 수진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이렇게 남루한 일상을 남길 뿐인가' 은희경, 빈처


은희경 작가의 문장은 예리하다. 핵심을 유머로 살짝 승화하면서도 한번 날카롭게 찔러주기를 잊지 않는다. 오래전 어느 책에서 은희경 작가의 윗 문장을 접했다. 해당 소설 전체를 읽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는 가정하에 작가가 적은 구절은 당시 미혼이었음에도 의미를 알 것 같았고, 마음에 남았다.

옷 따위가 낡아 해지고 차림새가 너저분하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남루하다(襤褸, 한자는 누더기 남, 누더기 루라고 한다)'는 단어가 결혼생활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나(앞으로도 그러고 싶지 않다.) 그것이 삶의 여과 없는 민낯에서 기인한 표현이라면 동의한다. 작가는 분명 감출 수 없는 삶의 적나라함을 알고 있었으리라.

삶의 모든 얼굴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순간순간 마주하는 삶은 자주 만만치 않았다. 온갖 종류의 희로애락을 예상치 못한 순간 맞닥뜨렸으며, 그에 따라 휘둘리는 마음과 태도를 통해 미성숙한 나의 모습을 여지없이 확인했다. 아름답지 못한 마음의 민낯을 보는 순간은 괴로웠고, 타인의 부정적 민낯을 마주하는 순간은 더욱 피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들에게는 깊은 본모습은 숨긴 채 그럭저럭 멀쩡하게 보이며 상대와 교류할 수 있었고, 상대가 허용하는 선을 넘지 않아 상대의 부정적 민낯까지 보는 일도 삼갔다. 친구들과 맺는 관계의 형태는 대부분 그러했다. 애정과 친밀함을 바탕으로 하되 각자가 가진 여러 모습 중 가장 멀쩡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꺼내, 서로의 친절하고 예의 바른 자아들이 교류하는, 남루할 수 없는 관계.

잠깐의 시간 동안 교류하는 사람들과는 필요한 자아만 선별해서 부분적으로 내보이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 본연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주 다정하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예리하게, 가끔은 누구보다 서늘한 모습들이. 결혼생활의 남루함이란 어쩌면 그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감정의 여과 없는 민낯, 특히 부정적 감정의 민낯을 상대에게 고스란히 드러내는 지점에.

배우자와의 관계는 단순히 좋다 나쁘다는 평면적인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순간의 마음과 감정, 당시의 상태, 상대의 상태에 따라 배우자 와의 관계는 시시각각 가변적이고 입체적 모습을 띤다. 그리고 예측불가의 일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삶을 겪으며 때로는 상대에게 감정의 민낯을 미처 가릴 새 없이 여지없이 노출하는 순간이 있다. 타인에게는 결코 꺼내지 않을 갖가지 자아의 얼굴을, 어쩌면 남루하다고 이름 붙일만한 감정의 민낯까지 남김없이... 그것은 함께 일상을 보내기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어떤 적나라함이다. 일상에는 결코 아름다운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깐.. 좋은 순간도 안 좋은 순간도 우리 삶을 이루는 본질이기에.. 그럼에도 어쩌면 관계가 가변적이고 입체적임에 구원이 있을지 모른다. 오늘의 부족함을 내일은 보완할 수 있으므로. 원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에.

지난 주말이었다. 하루종일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외출해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하지만,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나는 원하는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하며 자유로운 하루를 보냈고 충만했다. 밤이 되었고, 충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 남편과 아이의 귀가가 반가워지는 시간 남편은 아이와 함께 돌아왔다. 하루의 시간을 선물해 준 것으로 충분한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편의 손에는 나를 위한 케이크가 들려있었다.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의 케이크가 남편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는 순간 떠올랐다. 이 남자의 장점 중 하나가 발군의 센스였다는 것이. 그 장점이 나와 맞지 않는 (많은) 점들을 희석해 주고, 그를 보는 시선을 한동안 너그럽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결코 용의주도하지 않은 그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그것이 삶의 적나라함 속에서 삶을 윤기 있게 가꾸는 그만의 방법이라는 것을. 그날의 케이크는 실로 엄청난 가성비를 지닌 케이크였다.

케이크를 먹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분명 남편에게도 나의 어느 부분인가 그의 일상을 윤기 있게 만들어 주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과연 어떤 부분일까... 끝내는 묻지 않을 질문이 될 것 같다. 혹 거기에 얽매이고, 무의식적으로 의도하게 될까 봐, 거기서 빚어지는 부자연스러움이 싫어서.

나는 그냥 케이크의 달콤함만 즐기기로 했다. 기분 좋은 하루의 달콤한 마무리였다.


덧. 이 글을 쓰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여행 중이어서 글의 흐름이 끊겼던 이유도 있지만, 본질적 이유는 글의 완급을 조절하기 힘들고 조심스러웠다. 단어 선택 하나도 여러 번 고심하게 되었고, 글을 접을까 몇 번 고민했지만 한 번쯤 쓰고 싶었던 글이었고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마침내 이 글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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