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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ul 04. 2023

나의 우주(宇宙)를 용기 내어 발행해 봅니다.

당신의 귀한 삶의 한 모퉁이를 소망하며

"어떤 사람의 삶이든 그 화려함의 정도와 상관없이 다 나름의 가치와 소용이 있다고 여기기에 누구든 자신의 인생을 소재 삼아 거기서 길어 올린 생각과 감정을 글로 써서 '공개'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당신도 꼭 글을 써서 공개해 달라고. (중략) 내 삶이 당신의 삶을 만나 일으킬 변화를 나는 아직 제공받지 못했으니 내게 당신의 귀한 삶 한 모퉁이를 떼어달라고" -손화신, '발행'버튼 누르길 망설이는 당신에게(https://brunch.co.kr/@ihearyou/534)


  커다란 도화지를 가지고 있는 상상을 해본다.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한계 없이 적을 수 있는 거대하고 커다란 하얀 도화지를. '쓰기'의 세계란 그런 영역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계 없이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쓰기'의 지극히 광활할 세계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고, 길을 찾는 법 조차 모르는 날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광활한 그 세계에 원하는 날까지 오래도록 머물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내 안에 있는 나의 우주를 내가 가진 도화지에 가시화(可視化) 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글을 짓다 보면 나는 자주 한계에 부딪친다. 생각 속에서는 금방이라도 잡힐 것만 같고 보일 것만 같은데, 쉽게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아직 정확하게 가시화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를 느낀다. 

 어떤 작가분의 글을 읽다 보면 한계 없는 글쓰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한계치의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므로 본인 입장에서는 수없이 한계에 부딪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읽는 자의 입장에서는 이따금 그런 느낌을 받는 글들이 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고, 읽는 이 가 전율을 느낄만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과연 사람의 상상력의 끝은 어디일지 아득한 마음으로 상상해 본다. 

 아주 가끔 내게도 그런 날이 찾아온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직 정확한 크기를 모르는 나의 도화지 위에 원하는 방향으로 길을 내고, 그 속을 유영하는 날이 있다. 그런 특별한 날을 제외한 대다수의 날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고 이정표조차 없는 나의 하얀 도화지가 막막해서 다른 이의 글에 빚져가며 글을 쓴다. 손화신 작가님은 말한다. 본인이 만약,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필력을 갖췄다는 확신을 가진 후에 글을 썼다면 본인의 브런치에 축적된 글은 380개가 아니라 8개에 불과했을 거라고. (원문:https://brunch.co.kr/@ihearyou/506) 쓸수록 필력이 향상되고, 쓰면 쓸수록 점점 잘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의 글에서 어느 순간 전율을 느끼던 나로서 무척이나 위안이 된다. 그래서 쓸수록 점점 잘 쓰고 싶고 쓰기의 길을 내고 싶은 나는 그녀의 글에 빚져 다시 힘을 얻고, 쓰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에서 멀지 않은 나의 아지트 고정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 내린 듯 써 내려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잘 써지지 않아, 용기를 주는 글들을 읽으며 에너지를 끌어 모아 글을 쓰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그를 보낸 뒤 잠시 쓰던 글을 멈췄다. 언젠간 한 번쯤 그에게 내 글을 소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불현듯 그날이 오늘이고 싶었다. 최근 ngo 단체 뉴스레터에 발행된 나의 글 '상실에 관하여'(https://www.m-letter.or.kr/post-cont/contens-230630/)를 보내려다 '나'이기에 앞에서 잠시 '이방인'의 입장이 되며 나는 순간 멈칫했다. 두 가지 생각에 나는 사로 잡혔다. 한때 군인이었던 나의 이전 직업이 일본인인 그에게 행여나 불편함을 끼칠까에 관한 고민 하나와, 그와 나는 친구이고 이웃이지만 한편으로는 동료 학부모 관계인데 'ㅇㅇ의 엄마'가 아닌 나 개인의 삶을 오픈해도 될까에 따른 부담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그와 나는 국적을 초월해 개인 대 개인으로 우정을 나눴다 여겨졌고, '발행'에 관한 글을 읽은 뒤라 용기를 내 파파고(papago)를 동원해 나의 글을 번역해 그에게 보냈다. 최근에 글이 발행되는 기쁜 일이 있었고, 부끄럽지만 너에게 내 글을 소개하고 싶다는 메시지와 함께, 이곳에서 쓰는 메신저인 'LINE'을 통해 그에게 나의 글을 '발행'했다. 

파파고(papago)가 번역한 나의 글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답장이 왔다. 울컥하게도 그녀는 나의 글을 읽고, 자신의 귀한 삶의 한 모퉁이를 떼어 내게 주었다. 그녀는 나의 글 '상실에 관하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게 나눠주었다. 소중한 친구를 자살로 20년 전에 잃은 슬픔에 아직도 자신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살다 보면 웃을 날이 오지만,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그의 삶의 귀한 순간을 나는 알게 되었다.(もう20年以上前の話ですけど、私にはまだ時間が必要ですね。忘れることはできないけれど、生きていれば笑える日もあるのですよね。) 

 울컥했다. 그녀가 겪었던 상실도, 앞으로도 순간순간 찾아올 아픔도 모두 위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아픔에 도움이 되고 싶고 위로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손화신 작가님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족한 나의 우주에서 짜낸 글이 때로는 보잘것없어 보이고, 훌륭하고 흠잡을 곳 없는 글들에 비해 초라하지 않을까 망설여지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마 글을 발행하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내 삶의 어떤 순간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다시 그의 삶이 나를 변화시킬 것을 겪었기에 나는 용기를 내서 오늘도 글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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