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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ul 10. 2023

어떤 시절의 '잠'(睡眠 / Sleep)

잠:눈이 감긴 채 의식 활동이 쉬는 상태(국어사전 참조)

 경기도 양주에서 군생활하던 때의 이야기다.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날 배우 '정려원'의 인터뷰 기사를 본 것은.

그의 사복 센스가 좋아 보여, 퇴근 후 스마트폰으로 그의 사복 사진을 보았다. 핸드폰 검색이 그렇듯 시작은 사복사진이었지만, 연관된 다른 기사들을 보며 검색을 이어갔고, 어느덧 그의 인터뷰 기사로 넘어갔다. 문득 한 대목이 나를 잡아끌었다. '오디션에 계속 떨어져 TV를 안 보던 시절 밤 9시부터 잤다'는 이야기에서. 

 굉장히 암울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동료들의 활동을 보는 일은 괴로웠겠지. 어쩌면 그로 인해 더 괴로웠겠지. 무척이나 괴로워서 차라리 안 보고 일찍 잠들었으리라 생각하며, 상황은 다르지만 괴로운 시절을 지나고 있던 그 시절의 나는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나는 한 시간 더 당겨 저녁 8시부터 자자고. 

 시간이 흘러 현재 시점에서 담담하게 적어보면 이유는 이랬다. 의욕도 없고, 할 것도 없고, 마음은 괴롭고, 만날 사람도 없고, 깨 있으면 우울하고 뭘 할지 고민되니 그럴 것 없이 일찍부터 자자. 자다 보면 현실을 잊겠지 라는 생각에 저녁 8시부터 잠을 청했다. 

 잠들면 의식의 스위치가 꺼지는 것은 분명 하나, 스킬이 없어서 그런지 내게 잠은 도피처가 아닌 일상의 연장이었다. 괴로운 일상을 마친 밤에는, 꿈에서도 즐거운 무의식으로 떠나지 못하고 삶의 무거움에 짓눌렸다. 당시 맡았던 업무와 처한 상황은 수시로 꿈에도 찾아왔고, 간혹 현재와 관계없는 꿈을 꿔도 즐거운 꿈은 없었으며, 억지로 일찍부터 잠든 부작용인지 중간에 틈틈이 깼다. 잠결에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하고, 그렇게 아침까지 잠을 억지로 이어가며 출근시간에 맞춰 눈을 뜨면 개운치 않았고, 새로운 날의 새로운 괴로움이 찾아왔다. 몽롱한 정신은 덤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견디고 퇴근하면 다시 8시부터 잠을 청했다. 전역자원이던 나는 조금씩 퇴근시간이 앞당겨지고 있어서 원한다면 8시부터 잘 수 있었다. 가끔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 있었지만, 기꺼이 함께 저녁을 먹을 만한 근처 부대의 동기들이나 사적 친분이 있는 몇 안 되는 동료들은 대부분 바빴기 때문에 나는 8시부터의 밤잠으로 그때의 어느 한 시절을 가까스로 넘겼다.   

 그 후 잊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던 그때의 '잠'에 관한 기억이 소환된 것은 며칠 전 집어든 한 권의 책을 통해서였다. '아무튼 잠'이라는 제목에 가벼운 호기심이 들어 집어든 그 책은 예상과 달리 묵직하고 마음 한 곳을 지긋히 눌러주는 에피소드들이 등장했고 책을 읽던 나는 어느 한 부분에서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췄다. 

  '잠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슬라임처럼 만지면 만지는 대로 형태가 변해서 결코 완성되지 않는 얼굴을. (중략) 어느 밤엔 체념증후군에 빠진 스웨덴의 난민 아이 얼굴이 되기도 한다. 난민 신청이 거부될까 두려운 나머지 아이들이 뇌의 인지 기능을 끄고 길면 몇 년까지도 깊은 잠에 빠진다는 다큐를 봐서일 것이다. 마음 놓고 잘 만한 곳을 확보하지 못하자 자발적 혼수상태로 자신을 보호하는 아이들. '아픈 잠'을 사람으로 형상화하면 그런 모습일 것이다. 잠의 얼굴은 그때그때 마음에 맺히는 것을 반영해 빚어진다.' -아무튼 잠, 정희재

 아픈 이야기였다. 나의 이야기와 비교조차 염치없는 그 아픈 이야기를 만 분의 일이라도 공감한다고 말하기도 미안해 섣불리 공감한다고 말을 꺼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바라본다. 아직도 잠들어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 한 시절을 잠으로 잘 넘기고 이제는 깨어나 그들 앞에 펼쳐질 찬란한 인생을 생생하게 누리기를. 그들에게도 기필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피할 수 없는 삶의 희로애락은 있을지라도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순간순간 반드시 나타날 기쁨의 감각을 믿고 살아보기를 바라본다.   

내일이 올 것이 두려워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평안이 있기를 바라본다. 


 그럼에도 위로가 남아있다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인 그 시절의 잠든 나에게도 위로를 보낸다. 


군대이야기에 관한 글을 쓸 때 나의 소울푸드인 커피믹스. 더우니 아이스 버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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