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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un 01. 2023

일탈(逸脫)과 이탈(離脫)의 시간

군생활을 견디며

 양주에 근무할 때 서울 본가에서 근무지가 가까웠다. 차량 정체 시간대만 피하면 한 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시절 자주 본가에 갔다. 때로는 공식적으로, 때로는 비 공식적으로. 

 양주에서 혼자 보내야 하는 주말은 쓸쓸했다. 인간관계는 제한적이었고, 특별히 누굴 만나고 싶지 않은 날의 숙소는 쓸쓸했다. 그저 퇴근해서 씻고 자는 것에 최적화된 나의 숙소에는 나 개인을 위한 것은 별로 없었고, 오래지 않아 떠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붙이지 않아 특별히 꾸미지도, 많은 물건을 들여놓지도 않았다. 부대가 있던 마을은 작은 마을이어서 어디에 있던지 금방 누군가의 눈에 띄었고, 당시 가지고 다녔던 차량 또한 나의 동선을 증명하는 한 방편이었다. 출근하면 누군가에게 "XX건물 앞에 차가 세워져 있던데 거기 다녀왔나 봐요."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 도시에 나 개인의 자리는 딱히 없었고, 스스로도 원하지 않았다. 

 약속도 없고 근무도 없이 특별히 메일 것 없는 주말이면 군인이 되기 전 나의 세계로 자주 돌아갔다. 한 시간 정도면 이동 가능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못 돌아갈 거리는 아니었고, 안 들키는 게 낫겠지만 들켜도 어쩔 수 없다는 약간의 체념 상태였다. 긴 시간을 혼자 숙소에서 보내는 시간을 피하는 것이 간절했다. 전역하는 날까지 숨 막히는 침묵과 고립에는 결국 익숙해지지 못했다. 

 어느 주말이었다. 그날도 본가에 있었고, 한술 더 떠 함께 근무하던 후배와 점심 약속이 있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방문했던 초밥집의 초밥이 맛있어서 후배와 함께 그곳에서 밥을 먹을 계획이었다.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려는 찰나 부대의 호출이 왔다. 수없이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순간이 하필 조금 멀리 나와있던 순간 찾아왔다. 후배는 휴가 상태라 호출에 응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나는 빛의 속도로 돌아가야 했다. 나의 상황과 입장을 잘 아는 그는 미안해할 것 없다며 신속하게 택시를 잡아주었다. 빠르게 환복하고 차를 몰고 부대로 향했지만 씻는 시간을 감안해도 이미 자연스럽게 도착할 시간은 지났다. 이동 중 걸려온 당직 사령의 전화에 말도 안 되는 변명은 안 하니만 못해서 솔직히 말하고 늦었지만 지휘통제실로 향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던 점검 차원의 호출이었고, 그날 과장은 휴가라 공석이었으며, 부대도착 후 얼마지 않아 호출은 해제되어 다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고 아무도 내게 조금 늦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일은 당시에는 몰랐으나 누군가의 마음에 분노의 불씨를 남긴 채로 도화선에 불이 붙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 이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과장은 무언가로 인해 몹시 분노한 상태였고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는지 격하게 분노를 표출하며, 과원 한 명 한 명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간 차곡차곡 쌓아왔던 분노를 표출하던 그는 나에게 그날의 일로 격하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분노의 방식은 타당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과장이 휴가를 간 동안 대신 책임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 근무지를 이탈할 수 있냐는 분노의 내용은 타당했다. 평소에 화를 자주 내던 사람이었으면 연민의 마음이 없었겠지만,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을 처음 본 나는 한편으로 그가 안타까웠다. 군생활에 뜻이 넘치던 그가 밤낮없이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아랫사람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밤낮없이 헌신적이지는 못해도, 내게 맡겨진 업무만큼은 빈틈없이 처리해서 그가 군생활을 계속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시 내게는 최선이었다. 

 그 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 그 시절의 나를 넘지 못했다. 아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적막과 공허함과 고독을 이기지 못했을 것 같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시절의 두려움을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의 유연함이다. 넘지 못할 것 같고 굳이 그렇게 까지 부딪칠 필요가 없는 일은 때로는 피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만큼 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 유연해졌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겠지만 그날의 일은 비 공식적으로 산으로 가던 나의 군생활이 공식적으로 커밍아웃된 하나의 계기였다. 마음에 감추인 것을 끝까지 숨길수는 없었을 테니 언젠가는 찾아올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남은 시간들을 견디며 전역을 기다릴 뿐이었다. 

 끝으로 이것은 나 개인적인 군생활에 관한 글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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