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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May 30. 2023

포근한 마음이 내준 소박한 한 끼

어느 날의 카레라이스와 바나나 셰이크

 탄약 부대에 근무할 때 탄약을 가지러 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업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상대가 여자 군인일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마치 외국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서로 상대를 의식하게 되는 경우라 해야 할까. 특히 같은 여군사관의 경우 동질감이 앞서 초면에도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이 생겼고 어떤 인연은 한 번의 만남에도 친구가 되었다. J선배와의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나보다 1년 선배였던 그는 내가 근무하던 부대에 탄약을 가지러 왔고, 당시 같은 중위 계급이었던 우리는 나이도, 임관 연도도 비슷하고 같은 지역에서 지낸다는 공통점으로 처음 만난 날 적극적인 그의 행동으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밥을 한 끼 먹자고 청했던 그의 제안은 의례적 인사치레가 아닌 수일 내의 현실이 되었고, 덕분에 나는 그가 전출 가기 전까지 잠깐이었지만 타지에서 마음 기댈 곳이 한 곳 더 생겼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인지, 건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동경한다. 어떠한 꾸밈으로 이루어진 생기가 아닌 사람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생기가 가득한 사람을 언제나 좋아했다. J는 그런 부류였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그는 나처럼 전역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던 나와 달리 건강한 에너지로 군생활을 활기차게 하고 있었다. 차에 수영장비와 러닝화를 구비하고 다닐 정도로 운동을 생활화해서 그런지,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건지, 혹시 결혼을 해서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지 그의 에너지의 근원은 모르겠지만 나는 나와 다른 그의 당당하고 건강한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후에 나도 운동을 생활화하고 결혼생활을 해도 여전히 '나'일 뿐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그는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그냥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었음을. 가까이에서 조금이나마 그 건강한 에너지와 열정을 나눠갖고 싶었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퇴근이 늦었고, 배가 고팠으며 혼자 마땅히 끼니를 해결할 곳이 없었고 배달요리는 먹고 싶지 않았다. 늘 타이트했던 탄약 소대장의 스케줄은 그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몸은 물론, 무슨 일이었는지 마음도 너덜너덜 해진 날이었다. 요리를 할 기운도, 집에 식재료도 없었던 그날 문득 J 선배가 떠올랐다. 망설이다 연락해 봤더니 선뜻 본인의 집으로 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같은 아파트 기혼자 동에 살고 있었던 그는 주말부부 생활로 평일에는 혼자 지내고 있어 사양하지 않고 바로 찾아갔다. 늦은 시간이라 이미 식사를 마치고 여유로운 밤을 보내던 그는, 나의 방문에 귀찮은 기색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한 끼를 만들어 주었다. 냉동밥을 데워 접시에 담고 따뜻한 즉석 카레를 올린 것이 전부인 식사였지만, 혼자 식당에서 먹는 밥이나 배달음식보다 따뜻함이 담긴 음식이었다. 그가 후식으로 내준 얼음과 바나나를 넣고 갈아 만든 스무디도 맛있었다. 정작 본인은 진작에 잊었겠지만 그날의 소박한 한 끼가 내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성격의 차이일 수 있지만 지금도 나는 선뜻 집에 누군가를 부르지도, 음식을 차리지도 못한다. 누군가를 나의 공간에 들이려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집안을 청소하며 며칠 전부터 계획하고, 식사를 차려준다는 것은 난이도가 더욱 높은 일이라 차라리 바깥에서 만나 밥을 한 끼 사는 일을 택했을 것이다. 집에 누군가를 위해 갑자기 내줄만한 음식이 내 기준에 마땅치 않다면 이런 간단한 요리는 실례 아닐까 라며 상대의 마음과 관계없이 자기 검열을 거듭해 전전 긍긍하고 그 난감함이 얼굴에 드러나 상대에게도 편안함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런 류의 사람이다. 그런 나와 많이 다른 타인을 만나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군 생활의 장점이었다. 

 그렇게 그날 그가 내준 따뜻한 음식을 먹고, 소소한 수다를 떨고 밤늦게 다시 나의 숙소로 돌아왔다. 덕분에 그날분의 괴로움이 조금 해소된 상태로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다시 용기를 내서 나의 자리로 출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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