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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Aug 29. 2023

의도치 않은 순간이 노출되는 일

익명성에서 오는 자유

글과 글쓴이를 구분할 것, (중략)'나'라는 1인칭을 쓴다 하더라도 글쓴이 자신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임을 잊지 말 것, 설사 자전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글에 '사실'그 자체는 있을 수 없고 작가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사건만이 있음을 명심할 것.
-어딘, 활활 발발

 글을 쓰거나 글감을 고민하다 보면 내 안에 있었지만 미처 몰랐던 수많은 나와 타인을 마주한다. 쓰지 않았으면 만나거나 끄집어낼 수 없었을 그들을 만나며 글을 쓰는 시간은 감사한 시간이다.


 엄마는 친구가 많고, 성품이 다정(多情)하다. 그런 그녀와 함께 그녀의 생활반경으로 외출하면 자주 그녀의 지인들을 마주친다. 멀리서 그녀를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오는 그녀의 지인을 보며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당시 나의 상태(복장, 얼굴 등)에 관한 셀프 점검이었다. 과연 내가 지금 누군가를 마주치기에 적합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지에 관한 셀프 점검 뒤, (그렇지 않은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면 반가움보다는 당황함이 앞섰다. 그분들이 부디 당신의 친구인 엄마에게만 인사를 건네도 나는 전혀 서운하지 않고 오히려 제발 그러기를 바랐지만, 엄마만큼 다정한 그분들은 둘째 딸이냐며 나의 정체를 확인한 뒤 눈 맞춤의 시간을 갖고 안부를 건넸다. 반가움과 예의를 연출했지만 사실 별로 반갑지 않았고, 그것은 상대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였다. 악의(惡意)는 아니었다. 순수하게 '내가 지금보다 차림새를 신경 쓴 상황에서 우리가 만났더라면 좀 더 반가웠을 텐데요' 싶었을 뿐.

 군인시절에는 외출하면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딘가에서 목격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창원에서 근무할 때는 그곳이 결코 작은 도시는 아니었음에도 서로 가는 곳은 뻔했고, 그러다 보니 마트에서도, 시내에서도, 집 앞 슈퍼에서도 종종 부대 간부들이나 외박 나온 아이들을 마주치거나 그들에게 목격되었다. 누구와 함께 있으면 함께 있었던 대로, 혼자 있으면 혼자 있었던 대로 목격담을 전해 듣다 보니 나는 평소 복장도 신경 쓰였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일도 신경 쓰였다. 성격적인 부분도 있었겠지만 불편한 포인트는 이런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물건을 사서 나오며 같은 부대 선배를 만난 날은 자연스레 내가 들고 있던 물건들로 대화가 이어졌고, 그것들이 노출되는 것이 불편했다. "너 시리얼 샀구나. 밥 안 해 먹나 보네."정도의 스몰토크였지만 경우에 따라 민망했다. 아마 굳이 알려질 필요 없는 일이 불필요하게 주목받는 것에서 오는 민망함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인터넷 쇼핑도 보편적이지 않을 때라 훈련을 앞두고 방한 준비 품목이나, 개인 상비 품목, 특히 속옷 등을 살 때면 나는 좀 더 예민해져 일단 주변을 확인한 뒤 빠르게 쇼핑보다는 구매에 가깝게 필요한 물건을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친 뒤 바로 마트를 떠났다;  

 그런 나의 모습이 누군가의 시각으로는 과도하거나 까탈스럽게 비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은 이모를 통해 한차례 알았다. 창원에서 근무할 때 이모는 나를 보러 왔고, 하룻밤 내 방에서 묵고 갔다. 원룸이었던 나의 숙소는 평소 빨래를 건조하는데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모에게 방 한구석을 내어주니 빨래 건조할 공간이 부족했고, 이모는 옆 세탁실로쓰는 방 빈 공간에 건조대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나는 나의 옷들을 (여자들 전용 층이지만) 누군가가 드나드는 방에 펼쳐놓고 건조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고, 내 기준에서는 자연스러웠던 그 일에 이모는 사소한 일까지 과도하게 신경 쓴다는 반응이었다.  

 같은 선(線) 상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 후 시부모님 댁에서 묵는 날에도 비슷한 류(類 )의 불편함을 마주했다. 그분들의 성품과 관계없이 여건상 나에게는 편하지 많은 않은 기류에 머무는 것은 감안해도, 가장 신경이 쓰이는 상황은 자고 일어난 직후였다. 일어나서 화장은 안 해도 말끔하게 세수정도의 기본 단장을 한 뒤 시부모님을 대하기에 최적화된 상태로 전환될 시간이 필요한데, 겉모습 단장+친절함과 예의 등으로 내면을 단장할 시간이 부족한 채 그분들을 마주할까 봐, 아침이 오면 일찍부터 방 바깥의 행적을 살피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의를 살피느라 금세 피곤함이 몰려왔다.

 (어쩌면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쓰기 위해 아는 사람들에게 나의 글을 보이는 일이 꺼려지는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좋고 싫음이 아닌 성격적인 부분에서 빚어지는 문제이기에 글을 읽을 누군가의 구체성을 추상성으로 바꾸며, 개의치 않으려 노력하며 쓴다. )

 지내보니 그런 나에게 일본 생활의 편안한 점 중 하나는 익명성에서 오는 자유로움임을 깨달았다. 외출 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난 확률이 극히 낮은 이곳에서 나는 때로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어차피 공공장소를 다니기에 특별히 눈에 띌 행동이나 이상한 행동, 소위 진상이라 일컬어지는 행동 또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등을 결코 하지 않고 무난한 차림새로 다니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치 않는 순간을 누군가에게 드러내며, 아는 사람의 눈에 그다지 아름답지 일상의 않은 모습들이 우연히 발견될 확률이 무척 낮은 일은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그 자유의 성격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을 선호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것저것 마음껏 비교해 가며 편하게 구입할 수 있는 자유, 때로는 구경만 마음껏 할 자유, 편하게 식사할 자유(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먹다 보면 깔끔하게 먹지 못할수도 있어서 덜 친한 사람과는 아주 편하게는 밥이 안 넘어간다. 같이 밥을 안 먹더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내키지는 않으므로)등의 지극히 사소한 이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으므로 그렇다. 사실 일상의 대부분의 모습들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므로.  

 하나의 일화를 더 들자면, 기분이 침체되거나 아이와 한차례 언쟁을 거친 후 등원시키다 아는 이웃을 만날 때 급히 웃는 얼굴을 내보이며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괴로워지는 마음이라면 누군가는 그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있어서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남편과 나는 이 일을 공론화한 적도 있었고, 가끔은 이런 성격으로 스스로 불편할 때도 있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과연 '문제'일까. 개선해야 할 사항일 것인가. 나는 열린 마음으로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누군가를 반갑게 마주할 수는 없는 것인가. 답은 '아니'었다. 이런 성향은 문제가 아닌 나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적당히 나의 이런 면모들을 때로는 숨기고 감추고, 필요에 따라 때로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스스로를 조절해 상황에 맞춰가는 유연한 스킬이 필요할 뿐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내가 상대를 싫어해서 빚어지는 문제가 아니고 단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글을 쓰고 '발행'을 망설인 가장 큰 이유는 '유난함'으로 비칠 것에 관한 염려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비치는 것이 아니라 유난하고 까탈스러움이 드러날까 봐. 혹은 어떤 부분을 너무 사실적으로 가감 없이 쓴 것이 아닐까 싶어 민망해서. 무엇보다 자아가 비대해 보일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는 발행을 망설였다. 때로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글빨보다 용기인데, 나는 자. 주. 그 용기가 부족해 한계를 마주한다. 그런 내게 오늘 용기를 준 것은 책의 한 구절이었다.

 글과 글쓴이를 구분할 것, (중략)'나'라는 1인칭을 쓴다 하더라도 글쓴이 자신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임을 잊지 말 것, 설사 자전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글에 '사실'그 자체는 있을 수 없고 작가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사건만이 있음을 명심할 것.
-어딘, 활활 발발

 이 글은 '나'의 글이지만, 나의 시각으로 재 구성한 '나의 관한 글'일 뿐 '나' 자체는 아니라는 것에서 용기를 내어 마침내 글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글로 재구성된 모습은 노출될 준비과정을 거친 모습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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